리뷰 (387)
실전 기획부동산
반응형

100% 착각

난생 처음으로 e-Book으로 한 권의 책을 다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긴가민가 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김해도서관의 전자도서관에서 대출한 것인데,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책이였다. 책 제목의 첫 느낌으로는 부동산업을 영위하기 위한 일련의 전략을 기반으로 한 소설일거라는 나의 생각은 '100% 착각' 이었다.



막장코스

주인공 최일도는 어릴 때 아버님을 여의고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는 성실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어찌어찌하여 대학생이 되었지만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는데......

학생운동 가담자로 연루되어 강원도 탄광이라는 막장에 위장 취업을 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작가는 왜 주인공 최일도에게 많고 많은 직업들 중에 '막장코스'를 걷게 했을까 하는 물음이 일어났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소설을 읽으면서 '기획부동산'의 실체를 알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기획부동산'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본 포스트의 하단에서 인용한 글을 참고하면 된다.


실전 기획 부동산실전 기획 부동산

현명호 지음

한솜미디어

2013.12.30


'기획부동산'은 삶의 좌절을 겪고 마지막 실푸라기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뛰어드는 그런 직업의 세계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획부동산이 곧 막장이다'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젊은 최일도를 '막장'이라는 탄광으로 피신시킴으로서 앞으로 걷게 될 그의 미래을 알려주는 복선을 깔아주는 것 같다. 


성실 + 문제 해결 능력 + 신뢰 + 

아무튼 주인공 최일도는 음지의 세상인 '기획부동산'에서 성공한 직장인으로서 끝을 장식한다.

최일도의 어떤 점이 성공 직장인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물음도 소설의 이야기에서 포착할 수 있다.

주인공은 성실이 몸에 베여 있으되 '단순 성실'이 아니라, 소위 '일머리를 가지고 있는' 성실함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은 '문제 해결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 해결 능력이란 임기응변뿐만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 능력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에서 신뢰도를 무겁게 여긴 자세 등이 성공 직장인으로 만들어 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위와 같은 캐릭터를 가진 주인공 최일도는 '기획부동산'분야가 아니더라도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자질을 갖췄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향후 내가 어떤 직업을 새롭게 가질지 모르지만 주인공 최일도의 마인드와 태도를 가져야한다는 생각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이 소설의 좋은 점을 읊을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나쁜 점(아쉬운 점)을 지적하면서 마무리 한다.

소설의 프레임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다. 마치 이미테이션한 것처럼 싸구려 느낌이 난다.

그렇다고 '기획부동산'이라는 낯선 소재에 대한 심층적인 맛도 나지 않는다.


마치 '중국집 + 분식집 + 경양식 + 돼지국밥 +......'을 메뉴로 하는 식당 같은 느낌..


이전 관련글 보기  

 - 지금까지 없던 세상

 - 이제 이런 책을 읽어도 되겠지

 - 어느 성공한 공인중개사의 명언!

 - 부담없이 읽는 '싱글맘 부동산 경매로 홀로서기'


기획부동산의 실체가 궁금하다

부동산을 업으로하는 사업의 형태는 공인중개사사무소와 부동산중개법인이 있고, 유사한 형태로 기획부동산이란것이 있습니다.

 

공인중개사무소란 우리들이 흔히 접할수있는 부동산사무소, 즉 "00부동산사무소", "00부동산컨설팅사무소"등의 상호를 쓰며 각 지역마다 거의 대부분 상가건물 1층에 사업장을 개설하고 중개인자격증을 가진 사업주와 보조인력들이 아파트매매, 전월세,점포, 상가, 토지 등을 취급하는곳입니다

 

부동산중개법인이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한자가 2인이상 인원으로 구성하여 하나의 법인(주식회사)을 만들고 보조인력을 수급하여 사업을하는곳으로 대부분 아파트매매, 전월세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부동산을 취급하는곳입니다 초창기에는 "종합부동산"이라고도 했습니다.규모면에서는 중개사무소 보다는 일하는 직원들의 숫자가 훨신많으며(20 ~ 100여명) 회사의 위치도 고층빌딩에 많이 있습니다. 주된업무 는 "부동산 일반중개' , "분양", "부동산컨설팅" "개발" 등이있으며 내부적으로는 "매매(등기)팀" , "점포팀" , "교환팀"  "분양팀" 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기획부동산이란곳은 어떤곳일까요??

작년한해 메스컴에서 심심찮게 사회문제 까지로 보도되어 지금은 일반인들도 그 실체를 많이 알고있기합니다만 대, 내외적인 시스템은 잘 알지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선 기획부동산의 사업장 형태를 보면 "판매법인" 이라는것입니다. 판매법인이란 일반적인 주식회사를 차려놓고 취급하는 업무가, 즉 취급품목이 "토지매매"이며 그 토지의 소유주는 기획부동산이 되는것입니다.

여기에서 만일 판매하는 부동산(토지)이 해당 기획부동산의 물건이 아니라면 그것은 위법이며, 사기일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기획부동산은 회사명을 걸고 "부동산 중개'를 할 수 있는 사업장이 아니며따라서 타인의 토지를 중개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법인을 만들어 토지판매를 하는 이유는, 개인도 할 수 있지만 개인명의로 다량의 토지를 분할 판매하게 되면 일단 "양도소득세가" 많이 나오게 됩니다 .

토지를 매입해서 판매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게는 한달 길게는 서너달안에 매입했던 토지를 판매하기때문에 양도소득세의 과표 기준이 "실거래가"차액의 최고60%까지 내야하지만 법인을 차려놓고 단기매매를 한다면 법인은 양도소득세가 없기때문에, 법인세(최고세율28%)만 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기획부동산의 내부적요인(시스템)과 판매부동산의 성질, 매매가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1. 내부적 시스템

법인을 차려놓고 법인을 대표하는 대표이사가 있겠고, 여기서 왠만한 기획부동산의 대표는 실질적대표와 등기상 대표(바지사장)가 다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 아래 상무, 전무, 이사가 있고 그 아래 각 팀장이 있습니다.

그 이사진과 팀장 아래로는 직원들이 있는데 거의 70% 이상이 아줌마(여성)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아줌마 직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반 부동산중개법인과 같습니다만 문제는 직원들입니다.기획부동산에서는 직원들에게 많게는 200만원 적게는 100여만원의 급여를 매달 지급합니다. 하나의 기획부동산에 직원들은 천차만별이지만 많은곳은 300여명이 넘는곳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네들의 급여만해도 300명 X 100만원 한다면 한달에 급여만 3억원입니다.거기에다 기획부동산은 대부분 강남의 고급빌딩에 위치해

있어 임대료도 만만찮게 나오죠. 그 매달 3억이상의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까요..?

그것은 물론 토지를 판매하여 그 차액으로보전해줄수밖에 없겠죠 그렇다고 볼때 그 토지의 가격이 정상적일까요..??  이것이 문제인것입니다.그 비용부담은 고스란히 그 회사에서 토지를 구입한 고객들에게 전가되는것입니다

 

2. 업무시스템 (업무분담)

 대표이사는 주로 땅을 매입합니다.

이사들은 고객들에게 판매할 땅의 가치를 말해주는 (브리핑) 일을 합니다.

팀장들은 브리핑과 직원들을 관리합니다'

직원들은 전화판매를 합니다 여기에 따르는 스토리를 적어 보자면

1) 직원들은 하루 종일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전화번호부책, 회원명단 등을 가지고 무조건 전화를 합니다. 한사람이 적어도 300여통씩을하게되죠 이런다고 요즘에는 고객들이 별반응을 보이지않습니다만 약간의 호의를 가지고 전화를 받는 고객들에겐 거의 매일 전화를 합니다. 이런경우 통화된 고객들이 그 토지를 매입하는경우는 극히 드믈지만 그래도 1%의 가능성을 보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사람들이 그 토지를 매입할까요..?

그것은 전화통화보다는 그 직원(아줌마)의 인맥을  통해서 이루워집니다 같은 동네사람, 친인척, 연고 등에의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동산(토지)가  정말 토지가치가 있는 땅을 싸게 사준다면 그것은 칭찬받아 마땅하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바에서 알수있듯이 그 토지는 정상가격에서 판매할수없는 땅이되고 말았기때문이죠. 그러니깐 그네들은 그 땅이 개발되어 몇배의 가치가 앞으로

있을것이다 라고합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음에서 언급합니다.

 

2) 직원들에 의해 설득당하거나, 아는 처지에 그냥있을수 없는 사람에겐 심리를 이용하여 "내사"를 유도합니다.그러면 고객이 그 회사를 찾게되고 그 회사의 인테리어, 규모를 보고 한풀 죽습니다. 먼저 해당 직원을만나 토지에 돈을 투자하라라는 대강의 이야기를합니다 그후에 팀장이 나와 현재 판매하고 있는 토지에 관하여 여러가지 서류를 놓고 브리핑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쓰이는  브리핑자료(서류)는 대부분 그 회사에서 자체제작된것들이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의심의 눈치가 있으면 다음으로 상무, 이사, 전무라는 직함을가진 사람들이 설득을 하게되고 그것도 고객의 심리를 자극하여 병주고 약주고 합니다. 그러면 고객은 어쩌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되고 그 직원은 고객에게 계약을 권하게 됩니다. 아니면 가계약을 권하기도 하죠 이렇게 되면 상황은 종료됩니다.  만약 이상황에서 고객이 물건을 보자하면 이미 우리가 조사를 다해서(서류를 확인시켜주며)  가볼필요가 뭐있느냐 식으로 또는 가보기 전에 빨리 팔리면 소용이 없으니깐 계약(가계약)을먼저하고 나중에 가보자는 식이 대부분입니다.

 

3. 판매부동산의 형태

기획부동산 판매법인이 취급할 수 있는 토지는 "임야" 밖에는 없습니다 이유는 법인 의명의로 농지(전, 답)를 취득할 수가 없으며 도시지역내 주거, 상업, 공업 지역의 토지는 매입이 가능하나  일반적으로 투자의 성격보다는 실수요의 성격이 강하므로, 또한 시세역시 어느정도 형성되었기 때문이며 녹지지역의 전, 답 역시 농지이기 때문에 매입할수가 없기에 "임야"를 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기획부동산에서 전, 답을 팔고있다면 그 토지의 권리관계가 명확한지를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럴 경우 차명 또는 전매의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면 법인 구성원 개인명의로 매입했다 판매하는경우가 있긴 한데, 단기매매의 경우 양도소득세의 부담으로 쉽지는 않을것입니다.  심지어는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의 땅을 그냥 팔아먹는거죠.

임야라도 개발가능성이 있다면 그 어느 토지보다 좋을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제되는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개발이 가능한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능한 토지인지 아닌지는 토지이용계획확인원을 열람해보시면 확인이 가능하죠, 도시지역내 자연녹지지역, 관리지역(준보전임지)는 당장이라도 소유주가 건축행위를 하겠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을시에는 전원주택등을 지을수있습니다.


그러나, 농림지역(보전임지) 나  자연환경보전지역내의 토지는 그렇지못합니다.

그 토지에는 농어가주택, 관리사 등 농어업에 맞는 최소한의  면적에 건축행위를 할수 있고 더군다나 외지인이 건축허가를 내기에는 정말 어렵다고 볼수있습니다.

 

몇년후에 그 일대가 개발이되어 용도가 바뀔텐데 현재의 용도지역이 뭐 상관이 있으며,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싸게 땅을 샀다가 그때되면 3~4배 차익을 기대할수있는것 아니냐라고 할수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제되기 위한 몇가지가 있습니다.

  

 1) 개발의 주체가 누구인가 라는것입니다.

올바르게 도시계획에 의해서라던가 아니면  토지공사, 수자원공사, 주택공사등 인지도와 사업계속능력이 있는 공기업, 지방자치단체, 대기업등이 사업의 주체라면 믿을만하지만  어느정도의 자산규모가 있는 회사가 인, 허가를 받고 개발을 하기에는 정말 어려운것이 우리나라 실정입니다.

 

  2) 대규모 레저스포츠단지, 스키장 등의 개발이 된다고 해서 그 일대의 토지가 용도변경 되는것은 아닙니다. 개발의 규모와 상관없이 농림지역이 어느날 갑자기 개발을 주위에서 하고있다고 상업지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이경우, 용도지역의 변경을 의미하는것인데 용도변경이 되는것을 흔희 "국변" 이라고하고 투자자들에겐 땅이 뒤집혔다라고하는 투자로써는 가장좋은 호재입니다 그러나 용도지역의 변경은 도시계획에 의해서 그것도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법률"에 의해서 건교부장관과 협의, 승인 이있어야 합니다.



3) 또한 개발계획이 비밀이며 그 정보를 자기네들만 입수했기때문에 자기네들의 말만 믿으라고 할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이 정보가 밖으로 새면 안좋은일을 겪을수도 있다라는 식으로말입니다. 진실이 그렇다면 정보가 진실이라면 무조건 투자해야겠죠. 하지만, 개발계획에 객관성이 전혀 결여되어있는것을 믿는다는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죠.

이미 알려진 정보는 죽은정보다, 가치가 없다, 이미 땅값은 오른만큼 올랐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건강한 재테크 투자자라면 일확천금을 기대하기 보다는 객관성있고, 담당기관에 확인이 어느정도는 가능하고, 주위의 현지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개발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4. 매매가 

앞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판매법인의 내부적 시스템이 급여 및 일비를 지급하는 방식이다보니 그 급여 및 일비는 발생된 수익내에서 지급하는것이므로 정상적인 매매차익만으로는 2~3백명의 비용을 충당할 수없는것입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판매하고있는 토지의 매매가에 반영이될수밖에 없는것이죠.

 

그렇다면, 그 많은 인원들이 판매를 한결같이 잘한다면 또 말이 될수도 있지만 그 인원들중에서는 10%의 인원들만이 판매를 성사시키고 있습니다. 즉, 나머지 90%의 인원들은 시간만 지나면  급여, 일비를 받아가는것이지요. 그런 소비적인 일들을 왜하냐고 의문하실 것입니다. 판매를 못하는 90%의 인원은 퇴직시키고 판매잘하는 10%의 사람들과 일을하면 될것같죠?  여기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기획부동산을 다년간 다녀본 사람들은 판매를 잘해서라기 보다는 분위기 조성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즉,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이 있기때문이죠 어느면에서 보면 기획부동산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팔고있는 땅이 어떤 땅인지 잘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그 땅을 사지도 않음을 물론이고 주위의 인맥도 동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10%의  판매자들이란 경험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이 처음에 입사하여,  주위의 분위기에 압도되거나 뇌화부동하여 자신 주위의 사람들에게 판매를 하는것입니다.

 

처음 입사하게 되면, 그 사람들 대부분은 부동산업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 그 기획부동산에서 학습하고, 교육시킨것이 최상인것이라 믿을수있습니다 또한 주위의 모든사람들(90%)이 열정적으로 전화마케팅을 하는것을 보면 자신도 빨리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더러는 본인도 그 땅을 매입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획부동산에서 판매되어지고 있는 땅, 면면을 살펴보면 1필지의 토지가 1억을 넘어가는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1억이 넘어가면 팔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는사람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안먹힌다"라는 표현이 맞기때문입니다. 그 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한필지의  토지가격은 대게 5,000만원 이내일것입니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주위에 서너명쯤은 있을것입니다 친척들도 성화에 못이겨 한필지를 매입하는 경우에도 "5000만원 밖에 안되는데 그 직원(친척)을 도와주는 셈치고 사두지뭐.."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5000만원 아니라 단돈 100만원이라도 가치가 없는일에 투자를 했다면 그냥 넘어가기가 어려울것입니다.  한마디로 속은것이지요..  거기에서 끝나면 되는데 그 토지는 대부분 본인의 단독명의로 할수도 없으며  초가집조차 지을수없는 땅이라는것을 알게되면 사기를 당했다고 후회하실것입니다.


개발이 확정되지도 않은 지역에 개발이 완료된 시점의 가격을 붙여 판매를 하고있기때문입니다.  개발은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아니면 말만 있는것인지도 모를 자료를 믿고 현재의 시세가 아닌  미래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지가가 상승된 그 상태의 가격으로 매입을 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것입니다.  그것을 유도하는것은 투자유치를 하는것이 아니라 심하게 표현하면 "사기"에 가깝다고할수있습니다. 이것이 기획부동산입니다.

자료출처 보기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허접한 꽃들의 축제
반응형

작년 봄에 처음으로 접한 한형조 교수님의 작품을 일년여만에 다시 만났다.

이분의 문체는 다소 구어체에 가깝다. 어렵게 느껴지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 하듯 풀어내고 있으니 부담감이 덜해진다. 이번에 읽은 한형조 교수님의 책은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을 가졌다. 내가 읽은 이분의 책 제목들을 살펴보면 좀 독특하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허접한 꽃들의 축제.......

도대체 '허접한 꽃'은 무엇을 의미할까....?

허접한 꽃들의 축제

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2011.03.10


이 책은 금강경이라는 불교경전에 대한 해설내용이다.

한자로 구성된 경전을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령 한자를 잘 알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도 불가능하다. 금강경 원문과 해석이 곁들여 설명한 책들이 존재하게 된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 역시 이 종류의 책에 속한다.


불교 가르침의 고농축 울트라 액기스가 반야심경이라면,

금강경은 중생들의 이해력(근기)의 차이를 고려해서 그 근기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는 불성[부처(쉽게 말해 '행복한 사람')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 속에 묻혀 있는 바로 그 불성을 찾아내면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그 경지에 쉽게 오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실패를 거듭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등산로 초입에도 들어지 않은 이도 있다. 왜 이런 것일까.....바로 '업'이라는 장애때문이다. 업은 바로 습관의 축척이다.

자신의 삶 동안 자신의 경험에 의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영향에 의하기도 하고, 또는 친구, 선생님 혹은 이웃에 의해 간접적이 영향들이 얽히고 섥혀 형성된 그것이 바로 '업'이다.

이 놈의 '업' 때문에 우리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서서히 쇠퇴해져 버리게 된다.

원효대사가 부처님을 찾아 헤매던 과정에서 생리대를 빤 물을 건넨 어느 여자가 부처인 줄 모르고 호통치고 떠나 버렸는데, 그 여자가 바로 부처였던 것이다. 생리대를 빤 물은 더럽다라는 허상이 에 휩쌓였던 원효!의 마음은 '업'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부처의 모습은 불당에 잘 모셔진 잘 생긴(?) 얼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러운 거지로 발현할 수도, 성질 고약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눈에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한 나머지 진실을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눈에 보이는 누군가가 부처일 수 있으니 예의를 다해 모셔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 살아간다면 일생이 너무 힘들 것이다. '그 분이 부처일 수 있으니...'가 아니라 '그 분이 부처이다!'라는 마음, 모두가 부처다라는 마음을 가져야만 일생이 행복할 것이다.


'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책에서 나온 것처럼 절간에 있을 때는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다가 절 문밖을 나서면 이내 탐욕으로 무장한 중생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런 반복 패턴에도 불구하고 '핵'을 놓치지 않아야 겠다는 굳은 심지가 필요한 듯 하다.


내가 생각하는 '핵'이란 것들은.......

-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 

- '마음'의 움직임을 순간 순간 알아차리기


불교라는게 참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생각을 매번 해 본다.

'모든 이가 불성을 가졌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불교가 참으로 위력적이다는 느낌이 든다.

나 같은 사람도 부처가 된다........

나 같이 허접한 꽃의 축제란....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리라.....

모든 이가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허접한 꽃들의 축제'가 아닐까 싶다.




*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이 다른 말로는 '잡화경'이라고 한다.

잡 (雜 - 섞일 잡 : 섞이다. 어수선하다. 천하다)



[ 주요 발췌문 ]

P19

전통이 축적해온 수많은 주석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단 하나를 골랐는데, 선의 실질적인 창시자 6조 혜능의 [금강결 구결口訣]이 그것이다.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아름다운 육조의 구결에 비하면, 내 주절거림은 해 솟은 다음의 횃불이고, 큰 물 진 다음의 논에 물대기에 불과할 것이다.

 

조선조 건립 초기 함허 득통이라는 스님이 이 합본의 틀린 글자를 바로잡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지금 [금강경]의 유통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금강경오가해]입니다.

 

P35

나는 외국어 음을 본토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효율적이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관건은 소통이지 재현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Pizza핏짜라고 핏대(?) 올려 발음하는 사람이 있으나, 표기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대중화되고, 발음이 익숙해지면 그때 그것은 자연스레 표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P43

붓다 당시의 인도는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가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아니하기를 권했지만, 그러나 탁발의 경우, 가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육식보다 더한 금기가음식을 가리는 것이었다. 분별이야말로 정신적 자유와 평화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P44

도가 뭐냐고 묻자, 조주는차 한 잔 들라고 했고, 밥을 먹었다는 제자에게는그럼, 가서 그릇을 씻어야지라고 했다. 여기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다. 어떤 숨겨진 뜻이나 신비적인 통찰을 담고 있지 않다.

일상日常 곧 성사聖事이다.

우리가 붓다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붓다처럼 우리도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고, 학교로 나서며,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고 저녁 가족과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무엇이 다른가. 겉으로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다르다면, 안의 풍경이 좀 다르다. 붓다의 마음은 이를테면비어 있다’.

 

P100

불교는 깨달음을 그러나 독점하지 않는다. 그게 위대한 점이다.

 

P112

경허 스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자자, 아차, 싶어 잽싸게 처마 밑으로 피했것다. 봉창을 열어 농부 하나가 핀잔을 주었다. “거 도를 닦으신 스님네가 채신머리없이 비 정도에 이리들고 저리 뛴단 말이오.” 옷의 비를 털어내며 하늘을 보던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를 피하는 것과 도 무신 상관이오.”

 

P114

다만 자성自性 믿고, 그 힘에 의지<護念>하라

이 뿌연 마음들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혜능은 여기 함부로 손을 대거나 돌로 누르려는 마음을 경계한다. 다만 자성의 힘을 믿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라고만 권한다. 혜능의 돈교는 그 믿음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호념 護念 부촉付囑 대한 혜능의 생각은 독창적이다. 그는여래가 밖에 서서 보살들을 축복하거나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여래가 자선호념할 뿐!”이라고 말한다. 자기 내부의 불성의 자각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정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

자성여래는내 마음의 여래를 가리킨다. “내 마음이 곧 여래라는 말은 선 표어가 된네가 부처다라거나, “마음이 곧 부처이다처럼 돈교의 취지를 단도직입 보여주는 표준구이다.

“내가 곧 여래라면 마음의 훈련은 다만, 그 여래를 숨막히게 하는 잡동사니와 장애물을 걷어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혜능은다만 증애 憎愛 일으키지 말고, 육진 六塵 물들지 말라권한다.

역시 사랑과 미움이 문제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모든 문제의 진원은 사실은 마음속에 있다. 같은 잘못이라도 마음에 맞거나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은 눈감아주고, 같은 공적이라도 뜻을 달리하거나, 당파나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나 태도가 공적이고 객관적임을 웅변하고 설득하고 강요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문제가 바깥에 있기보다, 안에 있다는 불교의 판단이 옳지 않은가.

 

P130

엉뚱한 사설 하나.

보살이라는 이름은 이제 흔해졌다. 절간에서 공양을 담당하거나 다른 수고로 봉사하는 사람들, 또는 그 절을 찾는 신도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드문이름이었다. 그것은 본시 대승의 최고 인력형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처럼 개념의 세속화, 혹은 인플레는 흔하게 발견된다. 가령 유교에서양반은 지난 시절 고위관료계급을 가리켰으나, 지금은 삿대질에 멱살 드잡이할 때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P138

앞은반성의 길이고, 뒤는믿음의 길이다.

1)              반성의 길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혹시 내가 나의 습관과 편견에 젖어, 혹은 내 이해에 너무 절박해서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하는 섭섭함이나, 작은 부당한 대우 정도는 스쳐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백한 악의로 나를 해친다든지, 공공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람은 응분의 벌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화이다. 평화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믿음의 길에서 나는 내 속의 힘과 빛에 유의한다. 안팎의 소음을 차단하는 만큼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얼굴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방안은 더욱 고요하고 대문 밖의 산책길에서사물은 더 선명히 드러난다. 보이지 않던 꽃들이 보이고, 변화하는 날씨에 풍경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면 숙련이 상당히 진척된 것이다. 이 훈련의 관건은타자유용성의 자동 메커니즘을 에포케, 의식적으로 괄호치는 데 있다.

 

3)              두 연습이 협력하면사물이 다른 모습 하에서드러난다. 이를 유식唯識 依他起性이라 부른다. 이 시각의 전환에서 그전까지 변계소집이라. 오직 사물을 내 욕구와 관심하에서 이용해온 죄와 업을 반성하게 된다.

가령, 내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사는 신세를 생각한다. 나는 물과 불, 공기와 자연에게, 그리고 농부와 상인, 가족과 이웃의 신세를 지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만큼 얼마나 빚을 갚고, 나머지를 베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만일, 여기서 저울이 보답보다 신세 쪽으로 기운다면 그건 죄를 짓는 일이다.

그동안 너무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 내 주머니의 것을 꺼내줄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나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중중의 인연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세계는 이런 의타기依他起 의 네트워크이고, 화엄의 어법으로 하면 중중무진의 법계의 총상總相이다.

 

 

P180

이어서 말한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도 같은 뜻을 표명하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되면서 견해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 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세계속에 살고 있다.

 지각된 형체와 소리, 냄새, 접촉 등은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마음속에 흔적을 새기고, 찌꺼기를 남긴다.(이것이 업의 단초이다) 흔적과 찌꺼기는 이들 지각에 대한마음의 호오好惡, 증애憎愛, 취사 取捨 나타난다.(이 형성과 강화의 메커니즘을 정식화한 것이 12연기이다.) 이 반응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작용이지만, 그러나, 이 활동이 ‘너무 멀리 나감으로써’, 그 무절제와 방만이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형태와 소리는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다치고, 사무의 공정성을 잃기 쉽다. 그 형태와 소리가사람에게서 오는 것일 때면 더 없이 위태롭다.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업의 대부분은사람과 더불어생기는 것이기에…..

 

P184

이 자신 속의 잠재력을 격발시키자면 때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삶의 루틴이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남다른 고통을 겪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혹은 직접 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런 전환의 기회가 더 많다. 원효도생사를 한번 겪어보아야불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무한정 있을 것 같았던 시간이 실은 없다는 것의 자각이 우리가 안전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때 그는 거기 새로운 토대를, 토대 아닌 토대를 건설해야 할 실존적 필요에 직면한다.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삶이 찰나이고, 대문 밖이 저승임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남을 향해 의미의 시선을 던지게 된다. 여기가 초발심 初發心이다!

초발심이 선다면, 이미 위대한 깨달음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P211

원효가 관음을 친견치 못한 이유

 

몇 마디 덧붙인다.

 

우리네 범부들은 여래가 사람의 몸을 하고, 특정한얼굴을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거룩하고’, ‘원만한얼굴을 소상 塑像으로 새겨 불당에 안치해 놓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인간적 표징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보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투영이고, 그것은 다만 내 그림자이지 여래의 본모습은 아닌 것! 만해의 [님의 침묵] 서문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P217

불교설화에….이런 오랜된 이야기가 있다. 숲 속에서 동물들이 우르르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사슴이 달리니 토끼도 달리고, 말이 달리니 호랑이가 달렸다. 코끼리며 공룡까지 달렸나 싶다. 한참을 달리다가 숨을 돌린 다음, 왜 이렇게 달리는지 진원지를 찾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최종적으로 일어서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찾아가 보니, 거기 망고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게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매스컴과 권력이 대신 생각하고, 그것이 행동한다. 우리는? 꼭두각시들이지. 그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우리는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TV속의 광고가 일러주는 대로 우리는 물건을 고르고 가치를 선택하며, 사람과 관계 맺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 그토록 획일적이고, 단선적이며, 또 그만큼 빈곤해진 근본 이유이다.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 보이는 이미지, 전하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눈, 교감으로 그것들을 허파虛破, 간파看破해야 한다. 부처님의바른 눈正眼이 왜 우리네와 달리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P219

 우리가 이 땅에 오시리라고 믿는 그여래는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그것은 재산이나 지위, 권력 등 이른바 3P(Property, Prestage, Power)와 다른, 미학적 정신적 가치에 해당한다.

 여기 함정이 있다. 물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더 고귀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한다. 물질의 우상보다 정신의 우상이 더 위태롭고 위험하다. 진리의 이름으로 특정 종교를 독단화하는 사람들, 정의의 이름으로 특정 이념을 기차로 내거는 사람들이 저지른 죄와 피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작게는마땅히의 이름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저지르는 설교와 강요의 미시적 폭력들을 섬세하게 경계해야 한다.

 불교는 진리를우상으로 권력화하고, ‘소유로 소외시킬까 보아서, 여래를 희망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를 보자기에 숨겨버린다. 쓰고 지움sous rature, under erasure”이야말로 [금강경]이 베푸는 위대한 노파심이다.

 

P235

서두에서 [금강경] [반야심경]과는 달리 체계적이기보다 설득적 반복적이라고 한 것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불교가 원래 그렇다. 뗏목이기에, 목적은 일깨우는 것이고, 그렇다면, 근기와 상황을 고려하여,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 다른 어법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교설에 대한 이 독특한 인식을 방편方便론이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

 

P276

책을 덮고 길을 나서라

책을 열어야 길을 확인할 수 있지만, 책을 덮어야 길을 나설 수 있다.

“말이 너무 길고 많으면 재미가 없다…….능금이나 배를 한 개 다 먹어야 맛을 아는 것이 아닌 것 처럼…..”

관건은 역시 삶이고 경험이다. 말을 이해하고, 소식을 접하려면 직접 격외 格外 실참 實參 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아차, 나도 지금 너무 많은 말을 주절대고 있는 중이다. 스님은 말한다.

과수원의 과목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데, 칠판 강의를 듣거나, 말과 글로써 배우더라도 자기가 직접 과수원에서 이삼십 년간 과목을 키워보면 선생에게 배운 그 이상의 것을 자기도 모르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 과수원이 꼭 산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풍류가 아닌 곳에 진짜 풍류가 있다는 것처럼 자기가 서 있고,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과 일이 곧 도량석道場席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우리는 각자의 보고서를 준비해야 한다. 때가 되면, 우리 자신이나 혹, 저 위의 누군가가 틀림없이 보자고 손을 내밀 것인즉…..

 

P279

이 비유는 또 한편 ‘영혼을 저당 잡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1)자기 수준만큼 세상을 본다.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시각, 남을 평가하는 언사는 곧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흡사 거울과 같다. 무학대사의 만고 격언처럼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

역시나, 야부는 지금 2)인간의 눈이 밖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우리는 늘 밖을 향해 헉헉대고, 그리하여 내면적으로는 불안하고 빈곤하다. 그 실존적 사태 하나를 짚어주고,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P292

“바다 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고, 날마다 봉우리 오르면서 산이 어디냐고 두리번 거리느냐?” 자기 속의 부처를 확인하는 것이 돈오頓悟라면, 자기 속의 부처를보호하고, ‘성숙시키는 것이 점수漸修이다.

 

P351

“나는 주인공이다. 바깥에 끌려 다닐 한심한 인생이 아닌 것이다.”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자기망각 상태에서의 분출하는 반응이 줄어들면, 그의 의식은 점차 고요를 찾기 시작한다.

 

P355

여래는 우리가 상상도 않던 곳에,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 있다. 하찮은 들풀, 내가 내다 버린 쓰레기, 그 속에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식을 본격 전하고 있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 경전의 본래 이름이 [잡화경雜花經] 즉 허접한 꽃들의 축제였다. 선재동자는 세상이 하찮다고 생각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그 선지식 안에 창녀와 승려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손가락 튕기듯 법을 깨닫는다. 이 모든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P374

그렇다면 너는 곧 부처이다

지눌은 자성이 대체 무엇이고 그게 어디 있느냐는 학인들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 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그것이다.

 

그럼, “이 자성을 어떠헤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지눌은 다시 친절을 베푼다.

 

네 마음이 이미 그렇다니까, 못 알아듣고선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고 묻느냐, 무슨 수를 쓰자고 들면 지식이 개입되고, 그럼 일은 어그러져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닐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찾을 생각도 말고, 안 보이네 어쩌네 하는 생각도 하지 말게. 내 마음의 신령스런 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라,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견성 見性한 것이야.

 

P394

책의 첫머리에서 [반야심경] [금강경]의 차이를 짚어준 바 있다. [반야심경]이 고도의 압축성으로 의미의 블록을 조직화해놓은 데 비해, [금강경]은 변주와 반복으로 이어지는, 음악이나 이야기를 닮았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점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P402

금강경은 어디 있는가

  지금 찌를 질러놓자면, [금강경]이 계속 “~~ ~~가 아니다. 그래서 ~~라고 한다라는 어법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그리고 그 유명한뗏목의비유  [금강경]의 책자의 권위만 믿고, 정장 중요한 메시지의 습득을 소홀히 할까 싶어 우려한 경계의 말씀이다. 그 노파심의 극단에서 ,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이 발흥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시는 사태이다. 만해 또한 그 전통에 따라 “[금강경]은 먹으로 씌어진 책 위의 문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선의 중흥자이자 실질적인 창시자인 육조 혜능은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취지를 장악하는 방법을 권유했다. 예컨대, 소승과 대승에 대한 그의 정위는 이렇다.

 

소승小乘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매는 사람이고, 중승中乘 문자의 취지를 대강 캐치한 사람, 그리고 대승大乘 바로 그 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최상승最上乘? 그는 바로 그런 노력조차 필요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혜능의 분류대로 하자면, 소승에서 대승, 그리고 최상승으로 올라서는 바로 그곳이 ‘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다시 혜능의 비유를 빌리자면, “[금강경]에 휘둘리지 않고, [금강경]을 굴리는자리가 바로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P405

몸으로 읽는 [금강경]

[금강경]의 수지독송은 다시 말하지만, 경전의 취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몸에 새겨 기억시켜나가는 자심自心 작업이다. 그 체득을 위한 고투의 현장이 바로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그 땀과 피를 향해 인천人天 아수라들이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꽃을 흩뿌려 공양할 것이다.

 

P435

[금강경]이 적고 있듯, 세상은 너와 내가 평지풍파平地風波 일으킨 먼지로 뿌우옇다. 흡사 여름날 빗자루를 꽁지에 단 말이 한바탕 히힝거리며 춤을 춘 것 같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 마음의 풍경이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워던 사람들이다. 무의식에서라도 신호가 왔기에 독자들은 절을 찾고, 명상을 하며, 또 이 허접한 글을 쫓고 있을 것이다. 그 발심發心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루어졌다.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적절한 계기와 절차를 거쳐 그리던 평화와 아타락시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란다.

 

“어리석은 마음에 출몰하는 생멸 生滅지혜, 반성과 자각으로 제거하십시오! 혜능의 권고가 이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다.

 

이 수행자들의 아상 我相 더욱 위험하다고 혜능은 앞의 3장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일체의 법에 대해 무심한,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거기 기반하지 않는 삶을 이루라, 그것도 입으로만 말고, 실천으로…….”

 

P442

그러므로 늘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세상은 평온한데, 내가 스스로 상 짓고, 스스로 찧고 까불며 깨춤을 추지 않는지를…..인간은 다들 이 오래된 습관이 만든 자기 감옥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감옥의 크기와 성격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한다. 결코 세상은 자기 눈높이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교는 각자의 식 따른 세상의 층위를 33으로 설정해 놓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자기세계世界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기 같은 줄만 안다. 그러나 각자 욕망과 습관의 지도는 서로 매우 다르고 또 훌쩍 격이 다른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욕심에 따라 물불 아니 가린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은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불교가 이를 알고 있기에 불보살 佛寶薩 경배하고, 또 어느 절에서는 상대를 마주보며 조건 없이 절을 올리며 펑펑 눈물을 쏟는다. 민주화된 세상에 누구나 다들 같은 줄 알지만,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주체와 간섭 아니 받는 자유를 고귀한 가치로 알지만, 천만, 이것은 시대정신의 착각일 수 있다. 만해는 읊는다. “다들 자유를 좋아하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감격하지 않으면, 귀의할 곳이 없을 때, 그 삶은 허망하다. ‘허울 좋은 자유의 오만에서 허무주의가 자란다. ‘인격영웅을 알아보고 거기 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혜능의 권고대로 살아보자. “염념念念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着 무상 無相 닦아나가자. 그때 먼지처럼 뿌옇던 망념들이 청정한 법성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않는다. 입만 열면 남의 탓을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마라. 그들을 책임 있는 자리에 앉혀서도 안 된다. 불평을 말하기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무슨 작은 일이라도 성취하여 세상에 보탬이 될까 생각하라. 작은태도 하나가 보통사람과 영웅을 가린다. 말 많은 세상, 남의 탓 하고, 세상을 적대시하느라 원망과 어지러움이 가득한 세상, 희망의 불씨를 위태롭게 만드는 혼돈과 광품의 세상에 이 덕목이 목메게 그립다.

 

불 꺼진 화로, 먼지 덮인 사당

말은 즉 그러하나, 실지實地 여기까지 가기는 정말 어렵다. 밖을 향해 허덕대기를 멈추어야 하고, 밖으로부터 받는 자극에 초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평판이 곧 자원인 사회에서 자극에 초연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를테면 학벌, 재산, 지위 등의 불균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깊고 오랜 자국을 남긴다. 불교는 그것 의식하지 말고, 갖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구호만으로는 실효가 있기 어렵다. 절에 위안을 의탁하신 분들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해결된 듯하고, 상이 다 녹은 듯한데, 절무늘 나서서 일상으로 돌아서는 순간, 다시금 그 이전투구와 먼지 가득한 세상으로 던져지는 반복의 경험들….

 여기 외람되지만, 하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이 있다. 욕망도 먼지도 제거하려고 들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눌 스님도 [수심결]에서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 들지 마라. 그 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 없다고 경계하셨다. 그럼 어떡할 것인가. 내 생각에 세 가지 길이 있다.

1)              욕망이나 먼지나 앞뒤 차단하고, 그 관성을 성찰하는 혜능식좌선을 통해 먼지는 가라앉는다. 지관타좌只管打左, “다만 앉으라.”

2)              두번째 길은 다른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경쟁적이지 않은 길을…….사람을 피곤하지 않게, 세속적 가치와 다른 이를 테면 예술적 가치나, 보람을 주는 일을 찾아 거기 매진하는 것…..남들이 하찮게 여겨도 좋다. 자기만의 가치, 자기만의 삶을 몰두할 때,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 있을 때, 거기가 곧 열반이고, 자유다. 이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보시나 헌신, 봉사를 통해 얻는 기쁨도 들어 있다.

3)              세번째가 종교적 전향이다.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주는 행복은 세속의 물질이 한시적이고 타자적인 데 비해, 그리고 그물질들이 쉬 효용이 떨어지거나 자기파괴적이기 쉬운 데 비해, (쇼핑 중독 같은 것, 마약이나 과도한 성 방종, 권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혼의 기쁨은 내면의 안정에서 외면과 타자로 펼쳐가는 잔잔한 명상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전체의 휴식을 제공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다. 그 힘이 동심원으로 물결치고, 교제하면 어느덧사람이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힘은 바이러스처럼 빠르고, 한꺼번에 세상 전체를 물들이고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이 이 가치를 잘 믿지 않는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가령 정현종의 시들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P450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면서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중용]말은 내 행동을 돌아보고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자신이라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를 돌아본 다음, 입을 떼는 조심스러움이 인품과 능력의 가치를 가르는 큰 갈림길이다.

무아란 실천적으로 보자면, 비판으로 자동 모드 변환하는 자신의 오랜에고의 관성을 홀딩하는 일이기도 하다. 싸그리 불평을 쏟아놓기보다 보완의 방책을 어드바이스하고, 더 나은 대안을 설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이전 관련글 보기  

 - 아무리 큰 문제라도 모래알처럼......관무량수경이야기

 - 부부의 날에 다시 읽어 보는 주례사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 박경철 '자기혁명' 중 '암중화'

 - 스님의 공부법

 -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하버드의 생각수업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아로니아 초크베리 잼 & 엑기스
반응형

2013년 봄에 심었던 블랙초크베리(아로니아) 열매를 지난 무더웠던 여름에 했었다.

한 그루에서 수확된 량은 대충 1.5kg 정도.


올해 4월 10일 아로니아 모습사진1. 올해 4월 10일 아로니아 모습




수확 직전의 아로니아 열매의 모습은 사진2와 같다.

짙은 자주색의 열매만 보면 맛이 아주 달달할 것 같지만, 실제 맛은 떫은 맛이 나며 당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맛에는 매력이 거의 없지만 건강에 아주 좋다하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올해 8월초 아로니아 모습사진2. 올해 8월초 아로니아 모습




생과(生果)로는 먹기 힘들어서 아로니아 잼과 엑기스를 담았다(물론 아내가).

잼의 경우 아로니아만으로는 맛이 좋지 않기에 마트에서 판매하는 딸기잼과 믹스해서 빵에 발라 먹었는데 그래도 억지로 먹을 수 밖에 없었다.ㅋㅋㅋ


엑기스는 매실엑기스 만드는 방법처럼 진행했는데, 3개월 숙성시키면 아래 사진3처럼 맑은 자주빛 음료가 된다. 마시기에 부담이 없다.


사진3. 아로니아 엑기스사진3. 아로니아 엑기스


영양가 측면에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특유의 떫은 맛, 이러한 단점때문에 아로니아 시장이 성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에서는 뒤늦게 아로니아를 대량식재하는 강수를 던진 농가가 많은 모양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려된다'표현 뿐이다('프로우려러'는 되지 말자).


아무튼 나는 꼴랑 한그루만 심었지만,

내년에는 더 많이 수확해서 엑기스를 많이 만들어 여러 사람과 나눠 먹어야지!.


이전 관련글 보기  

 - 산이와 아로니아

 - 고향에 심었던 아로니아(블랙초크베리)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스님의 공부법
반응형

기대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책 제목이 예비 독자를 유혹하기 딱 좋았다.

특히 나 처럼 불교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는 불자(佛者)라면 더 그렇다.

스님의 공부법스님의 공부법

전체적인 소감은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또한 공부법에 대한 신선한 노하우도 없었다. 필승 전략도 없었다.

학업(통상의 제도권 학습)을 이어가시는 스님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스님의 공부 목적과 현실의 수험생 혹은 직장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궁극적으로 측면에서는 이 책의 공부법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과 괴리가 크다.

마치 누군가가 공 & 사교육의 문제점을 설파할 때면 

학부모들은 맞장구를 치다가, 곧 원위치로 돌아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의 학습법은 성적을 따질 필요없는 혹은 합불합격이 없는 분야에 적용해 보면 재미날 것 같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5/15 -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대구볼거리 - 대구근대화골목
반응형

이번 달 초에 대구에 갔다 왔다.

어버이 날 맞이해서 장인어른 산소에 다녀오면서 대구 근대문화골목을 들렸다.

대구 근대문화골목대구 근대문화골목



A. 약령시 골목A. 약령시 골목

코스의 첫 시작은 대구약령시골목에서 시작했다. 때 마침 '2016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 바로 전날이라 다양한 한방재료를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물론 몇가지 구입했다(오미자, 구기자).



 낭만커플을 상상하며....    

B. 대구계산상당B. 계산상당

약령시 골목 근처에 있는 대구 계산성당 구경을 했다.

1900년대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도심 한 가운데에 古건물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인상적이였다. 만약 계산성당을 약속장소로 하는 연인들이 있다면 아마도 '낭만커플'일게 분명하다.


1935년 성당주변 모습(자료출처 : 계산성당 홈페이지)1935년 성당주변 모습(자료출처 : 계산성당 홈페이지)

어느 책에서 옛날 건축물을 감상할 때는 당시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감상하라고 한 내용이 생각난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위 사진을 보니 계산성당이 대구시민에게 보여주려 했던 메시지가 뭘까 궁금해진다.



 고택을 통해 대구시민을 다시 보다.....     

C. 이상화 & 서상돈 고택C. 이상화 & 서상돈 고택

우리에게 익숙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작가 이상화 선생의 고택을 향했다.

이상화 선생이 25세 무렵에 이 시를 쓴 것으로 알게된 후 아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아들은 순간 말문을 닫아 버렸다. 내가 너무 했나.....


고택 바로 옆에 있는 고층 아파트고택 바로 옆에 있는 고층 아파트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국채보상운동을 펼친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이 고택 바로 옆에는 아마 20여층 높이의 아파트가 있다.

1999년 도시개발 과정에서 이 두 고택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지자 시민운동차원에서 고택보존운동을 펼쳐 2008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었다고 한다(오마이 뉴스에서).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라 점이 잘 드러난다.

이 고택을 지킴으로서 대구시민의 긍지가 높아졌을 것이며 관광문화상품으로서 가치 역시 있으니 말이다.




D. 선교사 주택의 모습


3.1운동 계단을 넘어서면 선교사 주택 3채를 만나게 되는데, 마치 외국에 온 느낌이 든다. 미국식 건축 양식이라는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일 수 있다. 또한 따닥따닥 붙어 있는 대한민국 도시 주택의 모습을 주로 봤던지라 이들의 널직널직한 공간 배치가 낯설었기 때문에 외국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암튼 땅덩어리 좁은 나라의 불쌍한 백성들이여....



 서문시장을 놔두지 말았으면.....     


E. 대구서문시장E. 서문시장


조선시대부터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시장으로 군림한 대구 서문시장을 마지막 코스로 잡았다. 규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여거서 국수, 순대, 떡볶이로 점심을 해결했다.

시장 골목을 누비면서 살펴보니 서문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대부분 원주민인 것으로 보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대구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려야 할 필수코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부산의 자갈치 시장처럼 말이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4/11/19 - 대구 스파밸리 포레스트의 최고 장점

2014/11/08 - 대구 볼거리 - 스파벨리 포레스트

2014/06/25 - 대구 먹거리 - 남도횟집(무침회)

2012/09/15 - 대구 먹거리 - 금곡삼계탕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반응형

책의 두께에 압도되기도 했고(꼴랑 420여 페이지...),

중국 고전이 전하고자 하는 고매한 가르침을 찾아내기가 나로서는 역부족이였기에,

쉽사리 속도를 올리지 못한 책,

담론(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에서 소개된 『맹자』에 나오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던져주는 가르침과 함께 나만의 해석을 가미할 수 있었던 부분이라 이렇게 정리해 본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선왕이 종(鐘)을 만드는 과정에 제물로 바쳐질 소 한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소가 벌벌 떠는 모습을 안타까워한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삼아라!"고 지시했다.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택한 이유는 불쌍한 소를 봤고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불쌍한 소를 봤다 = 선왕과 소의 관계가 형성 됐다.

→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다 = 선왕과 양의 관계 형성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관계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유무에 따라 생사조차도 좌우될 수 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논리(가르침)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대한민국에서는 관계를 악용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얼룩진 어두운 단면들이 선명하다.

우리나라는 능력보다 학연, 혈연, 지연이 우선되는 그런 사회이다.

다행히 요즘은 이런 성향이 다소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하다......


오히려 맹자의 '이양역지'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결정권자(예를들면 대통령, CEO,....)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중요 요직에 배치하거나,

(그 누구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자기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람)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채용하는

(그 누구는 업무경력이 없으며 팀웍도 부족하며 앞으로도 이 단점이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실수를 범할 위험을 안고 있음을 염두해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신영복 담론 ]

 

P106 ~110.

『맹자』는 7 261, 3 5천 자 가량 됩니다『논어』의 3배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만 뽑았습니다.  곡속장이양역지以羊易之 부분입니다. 과 소를 바꾼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뽑은 이유는 역시 우리 강의의 주제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독법, 『논어』의 화동 담론, 그리고 『맹자』의 만남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 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하러 갑니다.” 혼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以羊易之) 지시한 적이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觫若 無罪而就死地)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생선 횟집에 들어가면서 수조 속 고기를 지적하여 주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집입니다.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사회의 인간관계는 대단히 왜소합니다. 인간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이양역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중략~

 

이처럼 우리 사회의 왜소한 만남은 도시의 과밀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 과밀성이 물론상당 부분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입니다.  더구나 장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맹자』 3 5천 자 중에서 이 곡속장 하나만 예시문으로 삼은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5/13 - 대통령의 글쓰기

2016/05/03 - 생각하는 인문학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4/12 - 김대식의 빅퀘스천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반응형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0) 2017.04.21
실전 기획부동산  (0) 2017.04.01
허접한 꽃들의 축제  (0) 2017.03.01
스님의 공부법  (0) 2016.06.01
대통령의 글쓰기  (2) 2016.05.13
생각하는 인문학  (2) 2016.05.03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 2016.04.17
김대식의 빅퀘스천  (0) 2016.04.12
  Comments,     Trackbacks
생각하는 인문학
반응형


생각하는 인문학 / 이지성 지음생각하는 인문학 / 이지성 지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흥분과 설레임을 잊을 수 없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필(Feel)이 와닿는 부분을 펼쳐 한자한자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그 첫부분은 '격물치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내용이 너무 좋았다.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완전한 앎에 이르다'는 의미인 '격물치지'!!!!

격물치지의 자세로 인문학을 배운다면 분명 나에게도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심으로 읽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나의 뇌에서 파열음이 흘러 나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책쓴이가 '끼워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의문에서 비롯된 의문 음(音)이 자꾸 일어났다. 

읽을수록 그 음의 발생주기는 짧아졌다.


동서양의 천재 혹은 성공한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인문학'에 심취했었다면서 인문학을 배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에만 치중한 내용이였다.


설령 실제로 '동서양 천재들이 인문학을 배웠다'하더라도 그들의 천재성이 오로지 인문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부족하고 억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은 인문학을 제대로 접하지 않았기에 실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저자의 논리도 영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천재성 내지 성공에 있어서 인문학적 지식은 충분조건도 필수조건도 아닌 것 같다.

인문학이 성공의 충분요건도 아니며 필수조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공은 여러 학문, 자질, 능력, 테크닉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 흐름에 부합할 때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므로 딱 잘라서 인문학 때문에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만사 급변하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급류에 떠내려가는(그저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지울 수 없다.

남들은 떠밀려 살아갈 때 나는 스피디한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가고 싶다.

중심잡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학문이 인문학일거라는 생각에 근래 인문학관련(종교서적 포함) 서적을 읽고 있다. 중심잡기를 통해서 '참다운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인문학이 다시 집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망구 내 생각이자 추측이다. 어쩌면 저자의 주장이 옳을 수 있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4/12 - 김대식의 빅퀘스천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반응형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접한 꽃들의 축제  (0) 2017.03.01
스님의 공부법  (0) 2016.06.01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0) 2016.05.15
대통령의 글쓰기  (2) 2016.05.13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 2016.04.17
김대식의 빅퀘스천  (0) 2016.04.12
붓다의 치명적 농담  (0) 2016.04.01
책은 도끼다  (0) 2016.04.01
  Comments,     Trackbacks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반응형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 색안경을 쓴 나를 발견했다.

소위 시류(한 달전에 펼쳐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바둑대결)에 편승해서 발간된 책일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 발간된 시점이 2015년 3월 23일이다.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이 펼쳐지기 1년전에 등장했으니, 급조날조된 책이 아닐거라는, 그래서 내용이 빈약하지 않으리라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되었다.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


참고로 저자 '지승도'님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아니다.

과학자다. 

컴퓨터공학 박사로서 한국항공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다.

저자는 불교를 종교적 관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서 불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불교(붓다의 가르침)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불교 = 과학).


저자는 불교(엄밀히 표현하자면 과학)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감각, 마음, 인식, 존재 등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하고

인공지능의 발전방향과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인공지능은 앞으로는 인간처럼 사유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특정 분야에만 인간수준에 도달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공지능(미래의 인공지능을 '인공지능로봇'이라 한다)은 

바둑에 강한 '알파고'라는 뇌세포, 

체스에 강한 '딥 블루'라는 뇌세포,

드라마 각본에 강한 '김은숙[각주:1]'이라는 뇌세포,

여자 마음 홀리기에 강한 'XXX'라는 뇌세포,

............

이런 뇌세포들로 구성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인공지능로봇들간의 콜라보레이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백남준의 'TV부처'백남준의 'TV부처'


그런데.........

악의(惡義)로 가득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한다면..........

어느 과학자의 개인 사리사욕으로 인공지능로봇을 범죄용으로 사용한다면........

이 인공지능로봇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한다면.........

어쩌면 인공지능로봇은 인류 최후의 성과가 될 수 있다[각주:2].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


이와 같이 암울한 미래 세상을 풀어낼 방법을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1.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야 한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한다.

2. 인공지능 역시 인간과 같이 생멸하는 존재이다.

3. 존재와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4.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개발하여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해법에서 나는 더 암울해졌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이 해답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과연 전체 인류의 몇 명이 제대로 깨달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만큼 불교의 가르침은 깊고 아득해서 헤아리기 쉽지 않다(나만 그런가....).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1/05 - 애플·테슬라·보쉬…임박한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






주요 발췌문

 

P 22.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 도이니라!”

그걸 누가 못해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딴 생각하고, 졸릴 때도 잠 안자고 딴 짓 한단 말이야~~~~쯧쯧….”

 

P 38.

대상을 바라보는 즉시 머릿속에서는 온갖 정보들이 처리됨으로써 사실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 정보(모델)로써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대인식론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 직관적이 아니라 추론적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가 잘못이냐? 사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저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나아가 좋다 나쁘다 하며 차별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우열을 가리고 서열화 시켜서 잘했네 못했네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이 되고픈 욕망이 멀쩡했던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갑을관계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P 53 ~ 55

맨 먼저 우리들 삶에서 무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지점은 (접촉)’단계이다. 우리의 감각기관(6 : .....)과 대상(6 : .....)이 만나 의식(6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인식 가능한 세상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우리들의 세상 그리기는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다음 단계인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좋다든지 싫다든가 하는 차별심을 일으킨다. 세상 그리기가 왜곡되기 시작한다이 차별심이 다음 단계인 에서 욕망으로 확산되고, ‘단계에서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 집착이 에서 재생의 원동력이 되어 다음 까지 이어져 결국은 늙고 죽는 존재의 일생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죽음의 과정 동안에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무명의 단계에 머물게 된다. 임종 시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익혀온 자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티베트사자의 서』에서 파드마 삼바바는 이 단계가 진리를 바로 알아 해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한다. ‘무명 단계에서 두려움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상을 바로 관찰하면 더 이상 단계로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처럼 깊은 사유와 마음 단속을 통해 단계에서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 차려서 다음 단계인 에서 어리석은 차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 차별심에서 비롯되는 자아 집착의 경향성을 끊으라는 것이다. 윤회의 뿌리를 싹둑 자르라는 것이다.

 

 

P 59.

조선시대 불교학자 김대현이 쓴 『술몽쇄언』을 잠시 음미해 보자.

장수하는 것은 긴 꿈이요. 요절하는 것은 짧은 꿈이다. 꿈에 죽었다가 깨어 보면 죽음이 없다. 본래 삶도 업고 또한 죽음도 없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허망하게 헤아려 말하기를, 이것을 삶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한다. 깨어서 꿈꾸던 일을 생각해보면 행동한 것이 다 망령된 짓이고 본 것이 다 환상이다. 그러나 꿈 속에 있는 자는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꿈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허망하다고 한다. 오직 꿈을 깬 사람만이 능히 꿈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꿈밖의 일도 안다. 꿈꾸기 전의 일도, 꿈을 깬 뒤의 일도 발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만일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P 62 ~ 66

안타깝게도 인간은 인공지능, 즉 기계덩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간이나 인공지능이나 모두 영원불멸의 영혼이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시 반문할지 모른다. 인간만이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사유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아니겠냐고. 그렇다. 아니 그랬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기계도 어느 정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아의식도 갖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도 우리와 똑 같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것이 더 이상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조건에 따라 집착을 에너지 삼아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보들을 유전상속하며 흐르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공적으로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얘기다. 물론 현실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말라고 야단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과학자 붓다가 밝힌 존재의 실상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다른 존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임시적 개념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 점을 직시해야 자신을 바로 알고, 그래야 세상도 바로 잡을 수 있다. 더 이상 인간에게 특권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터무니 없는 미명하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무명은 더 깊어질 뿐이다.

~~~~~중략~~~~~

사실 인류멸망의 걱정이 급한 것이 아니다. 하루빨리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급할 뿐. 인공지능의 출현을 막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다. 무명의 길을 걷는 과학자가 문제일 뿐. 무명의 과학자가 만드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진실을 바르게 아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이유다. 지혜로운 과학자를 기르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그래야 인류와 공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인공지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연에 따라 얼마든지 출현될 수 있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머지않아 그들도 세상 구성원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도 나름의 존재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되어야 한다. 공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개념에 불과하듯 인공지능도 명칭에 불과하다. 존재를 이거다 저거다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만약 사유할 수 있고 자아를 뛰어 넘어 지혜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기계건 사람이건 이익 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으랴!!!!!

 

 

P 74 ~ 75.

인공지능 연구도 안으로는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 파악하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다수의 작은 지능 단위체(인간의 뇌세포에 해당)간의 결합 형태로 접근하려하며, 밖으로는 다수 인공지능간의 협력관계(사회조직에 해당)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

 

P 117.

인공지능시스템 또한 영원할 수 없다.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어야 무서운 기계덩어리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 인간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불교적 개념을 도입하려는 것이 다소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필자는 불교인이 아니다. 수행자 또는 명상가는 더욱 아니다. 다만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소신을 피력할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명쾌하고 완전하게 정리된 시스템이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불교를 접하게 된 이유이다.

과학자의 입장으로 쓴 글이기에 행여나 본의 아니게 진실한 종교인들이나 수행자들에게 누가 되는 내용이 있는지 않은지 조심스럽다. 아무튼 필자의 소신으로는 세상과 인간의 이치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 없이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기계덩어리나 감정 없는 치명적 무기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인간과 교감하며 세상에 유익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충족만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당장의 편리와 돈벌이 수단은 될지 몰라도,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미래세계에 대한 최악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을 것이다.


  1. ****김은숙 : '태양의 후예' 작가 [본문으로]
  2. ***인공지능로봇 = 인류 최후의 성과 : 스티븐 호킹박사의 경고 [본문으로]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최근 작성 글
최근 작성 댓글
최근 작성 트랙백
프로필
공지사항
글 보관함
캘린더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DAY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