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처럼 읽혀지는 보기드문 불교서적
대개 우리는 불교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불교 교리의 자체 특성도 그러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책 혹은 강좌의 딱딱함도 이런 인식에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라는 책은 딱딱한 불교공부(금강경)를 물 흐르듯 풀어가기에 흥미진지하게 읽어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책은 도끼다'에서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이라는 책을 소개하여 단숨에 읽어 버렸다.
불교는 이거다라고 압축해서 알려주는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P212부분).
이 책은 박웅현스타일로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재독 삼사독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깊은 깨달음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 주요 발췌문 ]
P24.
저는 불교의 이치를 다루되, 그것도 ‘아주
낮게’, 어디까지나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너무 수준높은 논의에, 옛 한문의 거친 어법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을 대중들에게 작은 위로와 이해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강의를 시작합니다.
P162.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줄여야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내 식으로 판단해왔다. 그 바탕에는 나의 존재를 보존 확장시키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깊이 작용한 듯하다. 이제부터 나도 모르게 벤 나의 편견과 습관, 관심과
이해관계 등의 개입을 반성하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을 해나가야겠다.” 이런 작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합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의 영향력을 줄이고, 내적 자유의 폭을 확대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팔정도로 알려져 있고, 또는 이를 계정혜의 삼학으로 정돈하기도 합니다.
P163
아비달마의 오래된 지혜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소유’는 세계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밀어붙인 강제입니다. 이 강제로 하여 본래 평화롭던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위협받고 깨어졌습니다. 이
오래된 습성을 고쳐야만 본래의 고요. 즉 열반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문장들은 전부 다 ‘소유’의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술부는 주부를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모두 소유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달마는 ‘나’로 시작되는 문장과 어법들을 오류투성이의 작문으로 단정하고, 그것들을
‘나’를 뺀, 순수
객관적 서술로 바꾸어나갑니다. 이 전략은 나我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 객관적 사태를, 즉 다르마dharma들(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우리는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냈다”는
문장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아비달마는 이것을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쳐줍니다.
1)
두 ‘물체色’가 있다.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愛’이
있다.
3)
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論하는
과정이 있다.
P168
세상의 점착으로부터, 아니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해탈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 저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하시는 분이 있군요. 그렇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여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고,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른 지혜 건乾慧'는 자칫 수행자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도 있으니, 깊이 유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P181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 기원전 2세기 합리적 사고를 향한 불교의 설득
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法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P212
잠깐 정리하고 넘어 갈까요.
1)
불교의 첫걸음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세계가 주관적 욕망과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 입니다. 주관적
욕망에 물든 환상의 세계를 상相이라고 합니다. 그 칙칙한 점착을 벗어난 객관의 세계를 법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상相의 세계에 집단적 무의식적으로 최면되어 있어서 객관적 법法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잘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습니다
2)
불교의 지혜智慧, 혹은 반야般若는 이 두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뜻
합니다. 그 통찰력이 고통과 갈등의 ‘이편 - 此岸’ 세상을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저편 - 피안彼岸’의 행복과 평화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실상 實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고 철저히 해나가야 합니다.
3)
오온五蘊은 바로 그 객관적 세계의 구소요소諸法 입니다. 오온을 통해 ‘자아’와
‘이름’에 물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폭로되고, 모든 문장과 어법은 ‘나’를
제거한 형태로, 남의 일처럼 순수 객관적 요소로 분석되던 것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무아無我, 나를 떠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해방됩니다. 그러고 나서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연기법과 화엄의 세계, 즉 사물과 각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緣起,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인 세계華嚴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P254
술병에 반이나 남은 술
가령 “술병에 술이 반밖에 안 남았다”와
“술병에 술이 반이나 남았다”는 서로 다른 진술입니까. 같은 진술입니까. 아비달마라면, 여기서
‘밖에’나 ‘이나’따위의 강조구는 분명 주관적 개입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그에 비해
“술병에 술이 반이 남아 있다”는 진술은 객관적 법法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수
등이 주도한 대승의 중관中觀은
“술이 있다”라는 진술 자체가 이미, 술에 대한 발성자의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그 사태를 향한 모종의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 합니다. 관심이 없었다면 술이라는 대상은
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거기 얼마쯤 담겨 있는지가 눈에 들어오지는 더더구나 않았을 것이며, 당연히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배를
정말로 끊은 사람은 스스로 “나는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는 법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유무 有無는,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임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유무 有無를 말할 때, 그것은 법法이 아니라 상相에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