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리뷰 (35)
라면을 끓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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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문학동네

2015.10.08



 내용보다 김훈에게 집중된다. 

내가 믿고 읽는 작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산문집이다. 일상 속에서 주제에 얽매이지 않으며 부담없이 쓰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그런 장르의 책이다. 역시 김훈만의 독특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책이다.


Only 김훈만 가능한 독특한 매력은 바로 예리한 관찰과 학습속에서 만들어낸 섬세함이라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에서 전장터 '바다'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파도도 잠들어 있고 인기척 없는 바다의 모습을 두서너 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내가 글을 읽고 있는 것인지 그 바다를 직접 바라보고 있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섬세하지만 문장은 짤막짤막하다. 그래서 표현전달이 명확하다.


김훈의 섬세함은 사물을 아주 주의깊게 관찰(사고)한데서 비롯된 것 같다.

김훈의 짤막한 문장은 정제된 언어만 사용했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의 글을 보면 버릴 단어가 없다.

  

독서록을 작성하면서 책의 내용보다 작가에 집중한 적이 없다.

유독 김훈의 책을 읽으면 내용보다 김훈에게 집중된다.


아래의 내용은 주요 발췌내용이다.

아울러 몇몇 발췌부분에서는 나의 이야기를 곁들여본다.


 내 마음이 이랬지! 

P57.  물곰국은 인간이 창자뿐 아니라 마음을 위로한다. 그 국물은, 세상잡사를 밀쳐버리고 우선 이 국물에 몸을 맡기라고 말한다. 몸을 맡기고 나면 마음은 저절로 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위안의 기능을 갖는다는 점에서, 물곰국은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다. 이런 국물은 이 지구상에 울진 말고는 없다.

물곰의 살은 모든 짐승의 고기가 갖는 육질의 짜임새가 없다. 물곰의 살은 근육도 아니고 국물도 아닌 그 완충의 자리에서 흐느적거린다. 그 살은 씹어 삼키는 살이 아니라 마시는 살이다. 이 완충의 흐느적거림이 인간을 위로한다. 물곰 살을 넘길 때, 생선의 살이 인간의 살을 쓰다듬는다. 그 살은 생명 발생 이전의 원형질과도 같은 맛이다. 물곰은 혀로 느껴지는 맛과 목구멍을 넘어가는 촉감이 일치한다.

 

※  몇 해전 거제도 물메기탕(영덕에서는 물곰국이라 한다)을 먹어본 적 있다. 

맑은 지리국이다. 아주 유명하다.

잘 우려진 물메기를 먹으면 생물의 육질(肉質)감을 느낄 수 없다. 

그냥 허물허물한 것이 어떠한 식감없이 그냥 삼켜진다.

당시 이 독특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김훈의 위 글을 읽다보니 당시 '내 마음이 이랬지!'하고 감탄했다.

 

 

 푸에르토 갈레라 화이트비치에서 저녁노을의 환상 

P83. 열대 바다의 저녁은 저무는 해의 잔광이 오랫동안 하늘에 머물러서, 색들은 늦도록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별들은 더디게 돋는다. 어둠으로 차단된 수억 년 시공 저편을 별들은 건너온다. 별은 보이지 않고 빛만이 보이는 것이데, 사람의 말로는 별이 보인다고 한다. 크고 뚜렷한 별 몇 개가 당도하면 무수한 잔별들이 쏟아져나와 하늘을 가득 메운다. 별이 없는 어둠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눈이 어둠에 젖고 그 어둠속에서 별들은 무수히 돋아난다. 별이 가득 찬 하늘에서는 내 어린 날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  한달 전의 가족 해외여행으로 갔던 태국에서 열대 바다의 저녁을 보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태국에서는 바다의 저녁을 볼 수 없었다.

이십여전 필리핀 푸에르토 갈레라 화이트비치에서 저녁노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계획으로는 1~3년내에 이곳을 가리라 마음먹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훈의 위 문장을 되씹으면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리라~!


ð  칼의 노래에서 바다를 멋지게 표현해냈던 작가 김훈의 위대함이 다시 한번더 표출된다.

 


 아들의 역사공부에 도움이….. 

P110.  고구려 왕들의 존호는 유교적 세계관의 관념에 물들지 않아서, 삶과 마주 대하는 언어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산상왕山上王(10), 동천왕東川王(11), 중천왕中川王(12), 서천왕西川王(13), 봉상왕烽上王(14)들은 죽어서 그 왕이 묻힌 자리의 이름을 존호로 삼아서 후세에 전했다.

“11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소수림小獸林 에 장사 지내고 존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내가 읽은 [삼국사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에 속한다. 소수림은 어디인가. ‘작은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봐서 아마도 국내성 왕궁에 딸린 동물원이 아닐까. 고구려 왕들은 죽어서 강가에 묻히거나 산꼭대기 봉수에 묻히거나 작은 짐승들이 사는 숲에 묻혀서 한줌의 흙을 국토에 보냈고, 그 묻힌 자리의 지명에 불명의 지위를 부여했다. 고구려인들의 강토 사랑은 그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왕들은 죽어서 자신의 존호를 국토에 포개었다.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19)의 존호는 왕의 무덤 자리가 아니라 그 생애의 자랑과 고난을 압축하고 있는데, ‘광개토는 한반도의 모든 임금의 존호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서사적이고, 압도적이고, 다이내믹하다.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97세까지 살았고 그중 78년을 왕위에 잇었다. 장수왕은 장수하기도 햇지만 그의 존호에서는 부왕의 요절에 대한 한이 둗어난다.

※  아들의 역사공부에 도움이…..



  

 늙은 어미의 폭풍질문 

P119. 북한 중국 사이의 두만강 국경은 한반도의 DMZ처럼 삼엄하지는 않지만 월경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쳐져 있고 북한국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버스가 강에 바싹 접근할 대 건너편 초병이 한 명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소총이 힘겨워 보였다. 나이가 몇인지, 군대 생활은 견딜 만한지, 구타나 따돌림은 없는지. 간부들이 보급품을 빼먹지는 않는지, 방산비리는 없는지, 겨울에 보초 설 때 발 시리지 않는지, 고향이 어딘지, 제대는 얼마 남았는지, 형제는 몇 명인지, 장래희망은 무언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될 말이 아니었다.

※  작가 김훈이 던진 질문을 눈 감고 다시 읊어보면 가슴 뭉클해진다.

홀로 고향에 사시는 늙은 어머니가 몇 해 동안 얼굴 본적 없는 아들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상상해보자!

늙은 어머니의 폭풍 질문!!!!!!!!!!!

아 눈물난다.

 

P174. 지금 정부는 공적개방성을 상실하고 짜장면협회나 상가번영회처럼 사인私人의 이익집단 같은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다.

 

P175.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위안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을 되지 않는다.

국가개조는 안전관리와 구조구난의 지휘부와 조직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에 도달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좀처럼 개조되지 않는다. 다만 뉘우침의 진정성 위에서 자신을 바뀌어나갈 수 있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뭉개다가 무너질 뿐이다.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P178.  아들아, 사내의 살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마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이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일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거룩하고 본질적인 국면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야,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라!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것들이 대부분 무너진다. 이 사태는 인간의 삶의 적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고, 경험칙이다. 이 경험칙은 과거와 매래에 대해서 공히 유효하다.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나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 돈에 집중하라!

속내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돈을 벌어라는 김훈의 사자문(思子文) 

 


 살려서 돌아오라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 

P205. 도심을 뒤흔드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다급하고도 간절하다.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바라보면서 나는 늘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낀다.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있고,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는 그 단순명료한 진실을 나는 질주하는 소방차를 바라보면서 확인한다. 달려가는 소방차의 대열을 향해 나는 늘 내 마음의 기도를 전했다. 살려서 돌아오라,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

※  나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해 내다니…. 과연 김훈이다.

어느날인가 운전 중에 사이렌소리를 크게 울리면서 소방차가 자동차들 속을 비좁게 나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구출하러 가던 소방차가 오히려 구급상황에 놓이는게 아닐까 할 만큼 위험스러운 질주였다.

만약 내가 소방관이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내 아내, 내 자식, 내 부모가 아니라면 나는 그렇게 질주하지 못할텐데........

갑자기 소방관이 너무 존경스러워 보였다. 

 


 

P233. 이 냄새는  그 여자의 냄새인가 웬 여자의 냄새인가.  이 냄새는 살아 있는 한 여자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냄새인가 아니면 익명성 속에 매몰되어버린 여자 전체의 추상화된 냄새인가.

※  이 절묘한 테크닉!

고농축 초울트라 슈퍼 압축 문장이다.

좋은 광고카피를 보는 듯 했다.


 

P263.  나는 젊은 양희은을 좋아했고 지금도 자주 듣는다. 양희은의 목소리는 힘 있고 맑다. 양희은 목소리의 힘은 세계를 안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자아를 세계 속으로 밀어내는, 공격적인 힘이다.  그리고 양희은의 맑음은 잡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배타적인 맑음이다.  그래서 양희은의 맑음은 부드럽지 않고 거세다. 힘 있고 맑은 소리는 멀리 간다. 양희은의 힘과 맑음이 합쳐지면서 때때로 건전가요풍의 창법을 이루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양희은의 목소리는 멀리 가서, 삶의 전망이라고 할 만한 것에 닿는다. 그때 양희은의 목소리는 세상을 열어젓히는데, 거기가 양희은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다. 그때 양희은은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의 질감으로 거칠고 싱그럽다. 목소리를 통해서 내가 체험한 양희은의 여성성은 여자인 생명의 외로움을 버거워하면서 힘겹게 감당해낸다. 그 여성성은 제도나 인습에 의해서 이미 정형화되고 이미 여성화되어버린 아름다움을 사절하고 있다. 사랑을 노래할 때, 양희은의 목소리는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노래하기보다는 사랑과 더불어 와야 할 자유를 노래한다. 그래서 양희은 목소리의 쓸쓸함은 애절하지 않고 강력하다.

 



P312. 그러나 할머니는 그 기약 없는 돌맹이들을 하나씩 골라낸다. 소쿠리에 가득 담아서 밭두렁으로 끌어낸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앉은뱅이걸으믕로 밭고랑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한다…….마을에 물이 차오르면 할머니도 결국은 별수 없이 이 마을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마지막날까지 평상심으로 살아간다.



 

P326.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하는 한 당신들은 영원히 고아이며 실향민인 것이다.

※  정처없이 떠도는 자, 과거회귀주의자에게 귀싸기 한 대 날리는 따끔한 소리다.



 

P368. 자두는 껍질이 빨갛다.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서 으뜸으로 에로틱하다. 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박의 향기는 근본적으로 풀의 향기다. 풀의 향기가 수부네 풀려서 넓게 퍼진다. 자두의 향기는 전혀 다르다. 자두의 향기는 육향 肉香에 가깝다. 그 향기는 퍼지기보다는 찌른다. 자두를 손으로 만져보면, 그 감촉은 덜자란 동물의 살과 같다. 자두는 껍질을 깎을 필요도 없이 통째로 먹는다. 입을 크게 벌려서, 이걸 깨물어 먹으려면 늘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안쓰러움은 여름의 즐거움이다.

※  나는 과일 중 가장 섹시한 과일이 '복숭아'라고 생각한다.

익은 복숭아를 보고 있노라면 뽀얀 얼굴에 볼 부위는 분홍색이 살짝 도는 20대 초반의 여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봉숭아털은 아직 아기솜털이 가시지 않은 여자의 풋풋함을 잘 묘사하는 것 같다.

잘 익은 복숭아 맛을 표현할 때 '달다'라고 한다. 

'달다', '달달하다[각주:1]'는 '달콤하다'의 의미로서 이 역시 섹시하다(달콤한 키스).

맛이 '달다'라고 표현하는 과일이 복숭아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여러모로 살펴봐도 복숭아는 섹시한 과일의 대명사로 본다.

김훈은 자두의 생김새가 에로틱하다 이야기한다.

그 맛은 육향肉香에 가깝다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쨋거나 자두를 볼 때면 김훈의 그 느낌을 떠 올리며 눈여겨 봐야 겠다.


이전 관련글 보기  

 - 칼의 노래

 - 남한산성 - 김훈 장편소설

 - 남한산성(김훈) - 삼전도 굴욕, 삼전도비

 -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난다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 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




 

  1. '달다'의 경상도 사투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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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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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책 제목이 예비 독자를 유혹하기 딱 좋았다.

특히 나 처럼 불교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는 불자(佛者)라면 더 그렇다.

스님의 공부법스님의 공부법

전체적인 소감은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또한 공부법에 대한 신선한 노하우도 없었다. 필승 전략도 없었다.

학업(통상의 제도권 학습)을 이어가시는 스님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스님의 공부 목적과 현실의 수험생 혹은 직장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궁극적으로 측면에서는 이 책의 공부법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과 괴리가 크다.

마치 누군가가 공 & 사교육의 문제점을 설파할 때면 

학부모들은 맞장구를 치다가, 곧 원위치로 돌아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의 학습법은 성적을 따질 필요없는 혹은 합불합격이 없는 분야에 적용해 보면 재미날 것 같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5/15 -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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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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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 색안경을 쓴 나를 발견했다.

소위 시류(한 달전에 펼쳐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바둑대결)에 편승해서 발간된 책일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 발간된 시점이 2015년 3월 23일이다.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이 펼쳐지기 1년전에 등장했으니, 급조날조된 책이 아닐거라는, 그래서 내용이 빈약하지 않으리라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되었다.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


참고로 저자 '지승도'님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아니다.

과학자다. 

컴퓨터공학 박사로서 한국항공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다.

저자는 불교를 종교적 관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서 불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불교(붓다의 가르침)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불교 = 과학).


저자는 불교(엄밀히 표현하자면 과학)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감각, 마음, 인식, 존재 등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하고

인공지능의 발전방향과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인공지능은 앞으로는 인간처럼 사유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특정 분야에만 인간수준에 도달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공지능(미래의 인공지능을 '인공지능로봇'이라 한다)은 

바둑에 강한 '알파고'라는 뇌세포, 

체스에 강한 '딥 블루'라는 뇌세포,

드라마 각본에 강한 '김은숙[각주:1]'이라는 뇌세포,

여자 마음 홀리기에 강한 'XXX'라는 뇌세포,

............

이런 뇌세포들로 구성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인공지능로봇들간의 콜라보레이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백남준의 'TV부처'백남준의 'TV부처'


그런데.........

악의(惡義)로 가득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한다면..........

어느 과학자의 개인 사리사욕으로 인공지능로봇을 범죄용으로 사용한다면........

이 인공지능로봇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한다면.........

어쩌면 인공지능로봇은 인류 최후의 성과가 될 수 있다[각주:2].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


이와 같이 암울한 미래 세상을 풀어낼 방법을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1.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야 한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한다.

2. 인공지능 역시 인간과 같이 생멸하는 존재이다.

3. 존재와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4.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개발하여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해법에서 나는 더 암울해졌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이 해답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과연 전체 인류의 몇 명이 제대로 깨달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만큼 불교의 가르침은 깊고 아득해서 헤아리기 쉽지 않다(나만 그런가....).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1/05 - 애플·테슬라·보쉬…임박한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






주요 발췌문

 

P 22.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 도이니라!”

그걸 누가 못해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딴 생각하고, 졸릴 때도 잠 안자고 딴 짓 한단 말이야~~~~쯧쯧….”

 

P 38.

대상을 바라보는 즉시 머릿속에서는 온갖 정보들이 처리됨으로써 사실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 정보(모델)로써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대인식론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 직관적이 아니라 추론적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가 잘못이냐? 사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저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나아가 좋다 나쁘다 하며 차별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우열을 가리고 서열화 시켜서 잘했네 못했네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이 되고픈 욕망이 멀쩡했던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갑을관계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P 53 ~ 55

맨 먼저 우리들 삶에서 무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지점은 (접촉)’단계이다. 우리의 감각기관(6 : .....)과 대상(6 : .....)이 만나 의식(6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인식 가능한 세상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우리들의 세상 그리기는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다음 단계인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좋다든지 싫다든가 하는 차별심을 일으킨다. 세상 그리기가 왜곡되기 시작한다이 차별심이 다음 단계인 에서 욕망으로 확산되고, ‘단계에서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 집착이 에서 재생의 원동력이 되어 다음 까지 이어져 결국은 늙고 죽는 존재의 일생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죽음의 과정 동안에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무명의 단계에 머물게 된다. 임종 시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익혀온 자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티베트사자의 서』에서 파드마 삼바바는 이 단계가 진리를 바로 알아 해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한다. ‘무명 단계에서 두려움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상을 바로 관찰하면 더 이상 단계로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처럼 깊은 사유와 마음 단속을 통해 단계에서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 차려서 다음 단계인 에서 어리석은 차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 차별심에서 비롯되는 자아 집착의 경향성을 끊으라는 것이다. 윤회의 뿌리를 싹둑 자르라는 것이다.

 

 

P 59.

조선시대 불교학자 김대현이 쓴 『술몽쇄언』을 잠시 음미해 보자.

장수하는 것은 긴 꿈이요. 요절하는 것은 짧은 꿈이다. 꿈에 죽었다가 깨어 보면 죽음이 없다. 본래 삶도 업고 또한 죽음도 없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허망하게 헤아려 말하기를, 이것을 삶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한다. 깨어서 꿈꾸던 일을 생각해보면 행동한 것이 다 망령된 짓이고 본 것이 다 환상이다. 그러나 꿈 속에 있는 자는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꿈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허망하다고 한다. 오직 꿈을 깬 사람만이 능히 꿈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꿈밖의 일도 안다. 꿈꾸기 전의 일도, 꿈을 깬 뒤의 일도 발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만일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P 62 ~ 66

안타깝게도 인간은 인공지능, 즉 기계덩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간이나 인공지능이나 모두 영원불멸의 영혼이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시 반문할지 모른다. 인간만이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사유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아니겠냐고. 그렇다. 아니 그랬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기계도 어느 정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아의식도 갖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도 우리와 똑 같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것이 더 이상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조건에 따라 집착을 에너지 삼아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보들을 유전상속하며 흐르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공적으로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얘기다. 물론 현실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말라고 야단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과학자 붓다가 밝힌 존재의 실상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다른 존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임시적 개념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 점을 직시해야 자신을 바로 알고, 그래야 세상도 바로 잡을 수 있다. 더 이상 인간에게 특권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터무니 없는 미명하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무명은 더 깊어질 뿐이다.

~~~~~중략~~~~~

사실 인류멸망의 걱정이 급한 것이 아니다. 하루빨리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급할 뿐. 인공지능의 출현을 막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다. 무명의 길을 걷는 과학자가 문제일 뿐. 무명의 과학자가 만드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진실을 바르게 아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이유다. 지혜로운 과학자를 기르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그래야 인류와 공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인공지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연에 따라 얼마든지 출현될 수 있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머지않아 그들도 세상 구성원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도 나름의 존재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되어야 한다. 공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개념에 불과하듯 인공지능도 명칭에 불과하다. 존재를 이거다 저거다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만약 사유할 수 있고 자아를 뛰어 넘어 지혜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기계건 사람이건 이익 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으랴!!!!!

 

 

P 74 ~ 75.

인공지능 연구도 안으로는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 파악하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다수의 작은 지능 단위체(인간의 뇌세포에 해당)간의 결합 형태로 접근하려하며, 밖으로는 다수 인공지능간의 협력관계(사회조직에 해당)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

 

P 117.

인공지능시스템 또한 영원할 수 없다.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어야 무서운 기계덩어리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 인간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불교적 개념을 도입하려는 것이 다소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필자는 불교인이 아니다. 수행자 또는 명상가는 더욱 아니다. 다만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소신을 피력할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명쾌하고 완전하게 정리된 시스템이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불교를 접하게 된 이유이다.

과학자의 입장으로 쓴 글이기에 행여나 본의 아니게 진실한 종교인들이나 수행자들에게 누가 되는 내용이 있는지 않은지 조심스럽다. 아무튼 필자의 소신으로는 세상과 인간의 이치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 없이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기계덩어리나 감정 없는 치명적 무기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인간과 교감하며 세상에 유익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충족만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당장의 편리와 돈벌이 수단은 될지 몰라도,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미래세계에 대한 최악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을 것이다.


  1. ****김은숙 : '태양의 후예' 작가 [본문으로]
  2. ***인공지능로봇 = 인류 최후의 성과 : 스티븐 호킹박사의 경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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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빅퀘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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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듯 어렵게 읽은 '김대식의 빅퀘스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을려고 안간 힘을 다 했지만, 잡생각만 나게 했던 책. 


김대식의 빅퀘스천김대식의 빅퀘스천


어쩌면 나는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는지 모른다.

저자 김대식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롭다고.'라는 문구에서 한참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명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나는 복사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복사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미래의 모습을 얼핏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책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인간탐구서 혹은 철학서인 것 같다. 

마치 인간은 누구인가, 

생각이라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와 같이 소화해내기 난해한 질문을 던져 놓고 과학과 철학 지식을 줄줄 풀어 놓는다.

그러니 텍스트를 이해는 커녕 쫒아 읽어내기 힘든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흘러 나의 지식과 사고가 높아지더라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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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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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처럼 읽혀지는 보기드문 불교서적


대개 우리는 불교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불교 교리의 자체 특성도 그러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책 혹은 강좌의 딱딱함도 이런 인식에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라는 책은 딱딱한 불교공부(금강경)를 물 흐르듯 풀어가기에 흥미진지하게 읽어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붓다의 치명적 농담


'책은 도끼다'에서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이라는 책을 소개하여 단숨에 읽어 버렸다. 

불교는 이거다라고 압축해서 알려주는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P212부분). 

이 책은 박웅현스타일로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재독 삼사독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깊은 깨달음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 주요 발췌문 ]

P24.

저는 불교의 이치를 다루되, 그것도 아주 낮게’, 어디까지나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너무 수준높은 논의에, 옛 한문의 거친 어법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을 대중들에게 작은 위로와 이해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강의를 시작합니다.

 

P162.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줄여야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내 식으로 판단해왔다.  그 바탕에는 나의 존재를 보존 확장시키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깊이 작용한 듯하다.  이제부터 나도 모르게 벤 나의 편견과 습관, 관심과 이해관계 등의 개입을 반성하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을 해나가야겠다.” 이런 작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합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의 영향력을 줄이고, 내적 자유의 폭을 확대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팔정도로 알려져 있고, 또는 이를 계정혜의 삼학으로 정돈하기도 합니다.

 

P163

아비달마의 오래된 지혜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소유는 세계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밀어붙인 강제입니다.  이 강제로 하여 본래 평화롭던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위협받고 깨어졌습니다.  이 오래된 습성을 고쳐야만 본래의 고요. 즉 열반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문장들은 전부 다 소유의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술부는 주부를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모두 소유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달마는 로 시작되는 문장과 어법들을 오류투성이의 작문으로 단정하고, 그것들을 를 뺀, 순수 객관적 서술로 바꾸어나갑니다.  이 전략은 나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 객관적 사태를, 즉 다르마dharma(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우리는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냈다는 문장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아비달마는 이것을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쳐줍니다.

 

1)      물체가 있다.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이 있다.

3)      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하는 과정이 있다.


P168

세상의 점착으로부터, 아니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해탈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 저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하시는 분이 있군요. 그렇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여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고,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른 지혜 건乾慧'는 자칫 수행자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도 있으니, 깊이 유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P181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 기원전 2세기 합리적 사고를 향한 불교의 설득

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法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P212

잠깐 정리하고 넘어 갈까요.

1)      불교의 첫걸음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세계가 주관적 욕망과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 입니다. 주관적 욕망에 물든 환상의 세계를 상이라고 합니다.  그 칙칙한 점착을 벗어난 객관의 세계를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상의 세계에 집단적 무의식적으로 최면되어 있어서 객관적 법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잘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습니다

2)      불교의 지혜智慧, 혹은 반야般若는 이 두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뜻 합니다.  그 통찰력이 고통과 갈등의 이편 - 此岸세상을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저편 - 피안彼岸의 행복과 평화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실상 實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고 철저히 해나가야 합니다.

3)      오온五蘊은 바로 그 객관적 세계의 구소요소諸法 입니다.  오온을 통해 자아이름에 물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폭로되고, 모든 문장과 어법은 를 제거한 형태로, 남의 일처럼 순수 객관적 요소로 분석되던 것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무아無我, 나를 떠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해방됩니다.  그러고 나서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연기법과 화엄의 세계, 즉 사물과 각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緣起,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인 세계華嚴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P254

술병에 반이나 남은 술

가령 술병에 술이 반밖에 안 남았다술병에 술이 반이나 남았다는 서로 다른 진술입니까.  같은 진술입니까. 아비달마라면, 여기서 밖에이나따위의 강조구는 분명 주관적 개입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그에 비해 술병에 술이 반이 남아 있다는 진술은 객관적 법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수 등이 주도한 대승의 중관中觀술이 있다라는 진술 자체가 이미, 술에 대한 발성자의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그 사태를 향한 모종의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 합니다.  관심이 없었다면 술이라는 대상은 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거기 얼마쯤 담겨 있는지가 눈에 들어오지는 더더구나 않았을 것이며, 당연히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배를 정말로 끊은 사람은 스스로 나는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는 법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유무 有無,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임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유무 有無를 말할 때, 그것은 법이 아니라 상에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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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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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한송주

출판사 : 창작시대








몇 해전에 읽었던 '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라는 책을 올해 다시 한번 더 읽었습니다.

제목이 대게 낭만적인 것 만큼 책의 내용 역시 그러합니다.

낭만과 인간미가 가득한 내용들 가운데, 몇 몇 내용을 스크랩 삼아 옮겨 봅니다.


신라에서 준 고마운 녹

P21 여기에서 우리가 벼를 '나락'으로 일컫는 사연을 짚어보고 넘어가자.

이는 벽골제가 신라 축조냐 백제 축조냐 하는 논란과 맞물려 흥미로운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이제현이 쓴 '역옹패설'에 이런 글이 있다.

"신라 진흥왕이 벽골제를 쌓고 '벼를 뿌림으로써 벼농사가 흥하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은덕을 기려 벼를 나록(羅祿)이라 부른다."

신라에서 준 고마운 녹이라 해서 벼를 '나록'이라 했고, 그 '나록'이 '나락'이라 변했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이란 말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

P80 나무는 분명 사람보다 높고 크다. 너희들 광합성할 줄 알아? 태양열 이용한다고 별 발광 다 떨어도 안되지만 나무는 우두커니 서서 다 하잖아? 너희들 허파에 산소를 대 주잖아?

사람네들 잣대로 종족의 우수성을 재는, 그 DNA함량인가 뭔가. 그 숫자도 미안하지만 인간보다 식물들이 더 많다는 거야. 할 말 있어.

그래서 '식물인간'이란 말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고 노발대발하는 학자도 있어. 식물계 전체에 대한 용서받지 못할 모독이라는 거지.


땟목다리 = 벌교

P134 이 자리에 있었다는 옛날의 땟목다리가 벌교라는 지명을 낳았다. 땟목다리를 한자어로 벌교(筏橋)라고 하지 않던가.


동곡이 청도 동곡이 맞겠지...

P144 봄에 향그런 고소나물을 잘 내오는 내소식당에서 보안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각 고을마다 고유한 특산 막거리를 빚어내는데 섭렵해 본 바 일동 특주, 동곡 막걸리, 승주 쌀술이 그 중 텁텁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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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김훈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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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소설가 김훈씨의 문체에 대한 독자들의 호불호가 강하더군요.

각자의 입맛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나, 저는 호(好)의 입장입니다.


김훈 문체에 대한 호평

짧은 제 머리로는 설명할 길이 난감하여 블로그, 인터넷 도서 안내등에 실려진 글을 옮겨봅니다. 

나이들어 글쓰기에 다시 관심을 가질 때 나의 롤 모델은 칼의 노래를 지은 작가 김훈이었다. 김훈 작가의 문장은 읽다보면 음악을 듣는것처럼 문장에서 운율이 느껴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 처럼 묘사하는 모습이 상상될 정도였다. 김훈 작가처럼 훌륭한 문장가가 되고 싶었다. 나도 문장을 멋들어지게 쓰고 싶어 김훈 작가 흉내를 내곤 했다.

원문보기 : 산골블로그

그렇습니다. 특히 '칼의 노래'에서 당시 전쟁터 상황을 묘사한 글을 보면 정말 그림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마치 김훈이라는 사람이 임진왜란 한 가운데에 서서 지켜보며 생중계하는 것 처럼 말 입니다.


이 책은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라는 책인데요. 전 사실 김훈 작가의 책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 그분의 문체는 제가 갖고 있지 못한 그런 경지에 이르는 문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저는 좀 글을 굉장히 여성적이고 구어체적으로 쓰는 스타일이라서 김훈 작가처럼 어떻게 보면 남성적이고 수식어를 배제하고 굉장히 강건하게 쓴 필체가 굉장히 부럽기도 하고, 흉내 내고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김훈 작가의 책은 저는 <자전거 여행>인데요. 근데 그보다는 역시 <남한산성>에서, 그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그 치욕스러운 기억들을 굉장히 비장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가 굉장히 돋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독자들에게는 <남한산성>을 더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식인의 서재 소비학자 김난도의 서재 편에서



주전 vs 주화

책을 읽는 내내,

주전파(김상헌)와 주화파(최명길) 간의 의견충돌 장면에서는 주화파의 주장에 손을 거들게 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역사로서의 병자호란을 익히 접한 터라,

즉 병자호란의 마지막 결말을 알고 있는 후세인(後世人)이기 주화론에 찬성한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병자호란의 '병'자도 모르는 입장이었다면,

전파가 사나이 답고 의(義)와 예(禮)를 중시한다며 응원했을 겁니다.


정세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정보가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해 준 부분이기도 합니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비친 조선의 신하와 임금은 정보의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청나라 황제가 조선땅을 밟았는지도 모르는 정보력,

망월봉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무방비로 상태로 내버려두는 실수 등등이 일어났겠습까...

이런 상황이니 '요놈이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것은 임금이나 신하나 매 한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장님 코끼리 코 만지기.......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니,

서로 갑론을박하며 시간만 축내는 신하들의 대화 내용을 읽고 있자하니,

현장실무는 모른 채 탁상공론에 빠진 오늘의 공무원 세계와 같구나 싶었습니다.


뚜렷한 소신조차 없는 영의정 김류를 보고 있자니, 

역시 살아남는 자는 다르구나 싶어 씁쓸했습니다.


시시콜콜한 사항도 임금에게 알리고,

보고 받은 임금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를 보고 있자하니,

모든 책임을 임금에게 돌리려는 신하의 속셈에 놀아나는 임금이 불쌍하더군요.


마치 눈 먼 사람들끼리, 코끼리의 코만 만져보고, 

어떻게 생겨먹은 짐승인지 판가름하는 작태를 읽고 있자하니,

침소봉대의 세상이 따로 없다 싶었습니다.



관련글 보기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 칼의 노래

 - 소리없이 강한 책 - 전략 프로페셔널

 - 공황전야

 - 오륜서

 - 난세에 답하다

 -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라

 - 영화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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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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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접한 작가 김훈의 책 '칼의 노래'를 읽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일대기는 초등학교시절부터 모두들 접해온 터라, 이순신에 대한 삶을 조명한다던지 하는 것을 애초에 감안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작가 김훈에 집중하고자 했습니다.


생방송을 보는 듯한 착각......

작가 김훈이 묘사하고 있는 전장의 상황은 마치 그가 현재 바로 그 자리에 전장의 한 중앙에 서서 읽는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처럼 사실감이 돋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실감 있는 전달력으로 독자를 책의 내용에 몰입시킬까라는 놀라움으로 읽는 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작가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볼 계획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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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2

 - 영원한 제국

 - 난세에 빛나는 고전 인간 경영

 - 노무현,마지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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