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남한산성(김훈) - 삼전도 굴욕, 삼전도비

얼마전에 읽었던,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의 장소가 삼전도라고하는 이런 치욕을 이른바 '삼전도 굴욕'이라고 하더군요.


삼전도가 어디인지 몰랐던 차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삼전도의 위치를 언급한 부분이 나와 있어 옮겨봅니다.

'석촌동 일대는 백제시대에 지배층의 공동묘역으로 흙무덤과 함께 적석총이라고 불리는 돌무지무덤(북한 용어로 돌각담무덤)이 떼를 이룬 것이 특색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흙무덤들은 다 농지로 변해버렸고, 돌무지가 가득한 들판에 인가가 모여 돌마을 또는 돌마리라고 불렸었다. 그런데 일제 때 지적도를 만들면서 한자어로 석촌동이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 잠실지구 종합개발로 택지가 정비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100여 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한강변의 안마을로 황포돛대가 머물던 나루터이자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항복했던 치욕의 장소인 삼전도(三田渡)가 여기이며 송파 산대놀이의 고장이기도 하다.'


무식한 제가 짐작했을 적에는 삼전도의 '도'가 섬 島 아니면 길 道 정도이겠지 했는데, 알고보니 건널 渡이더군요. 그런 의미로 보면 '나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받았던 

청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기념하고자 함은 당연하여 비석하나를 세웠는데 이름하여 '청태종공덕비'라고 합니다.


조선(한국)의 입장에서는

이름 그대로 굴욕의 증거이기에 되도록이면 지울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래는 위키피디아에 나온 내용을 옮겨왔습니다.


1.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2.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3.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4.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5. 1983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에 옮겼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6. 이후 고증을 거쳐 2010년 4월 25일에 비석이 서 있던 원래 위치인 석촌호수 수중에서 30여m 떨어진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의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겼다.

사진출처 : 노컷뉴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무리 치욕의 역사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자연훼손과 같은 이유가 아니라면 이를 올바르게 보존해야 하 원래 위치 그대로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역사이기에 인위적으로 지울 필요가 없으며,


지우는 것이 일반화 된다면 비리를 저질렸던 힘있는 자들에게

과거의 행위가 치욕이라면 언제든지 마음대로 지우고 조작하는 대의명분을 제공하기 때문 입니다.


관련글 보기  

2013/03/06 - 남한산성 - 김훈 장편소설


2013/02/24 - 칼의 노래


2013/02/19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