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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책의 두께에 압도되기도 했고(꼴랑 420여 페이지...),

중국 고전이 전하고자 하는 고매한 가르침을 찾아내기가 나로서는 역부족이였기에,

쉽사리 속도를 올리지 못한 책,

담론(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에서 소개된 『맹자』에 나오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던져주는 가르침과 함께 나만의 해석을 가미할 수 있었던 부분이라 이렇게 정리해 본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선왕이 종(鐘)을 만드는 과정에 제물로 바쳐질 소 한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소가 벌벌 떠는 모습을 안타까워한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삼아라!"고 지시했다.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택한 이유는 불쌍한 소를 봤고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불쌍한 소를 봤다 = 선왕과 소의 관계가 형성 됐다.

→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다 = 선왕과 양의 관계 형성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관계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유무에 따라 생사조차도 좌우될 수 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논리(가르침)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대한민국에서는 관계를 악용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얼룩진 어두운 단면들이 선명하다.

우리나라는 능력보다 학연, 혈연, 지연이 우선되는 그런 사회이다.

다행히 요즘은 이런 성향이 다소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하다......


오히려 맹자의 '이양역지'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결정권자(예를들면 대통령, CEO,....)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중요 요직에 배치하거나,

(그 누구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자기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람)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채용하는

(그 누구는 업무경력이 없으며 팀웍도 부족하며 앞으로도 이 단점이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실수를 범할 위험을 안고 있음을 염두해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신영복 담론 ]

 

P106 ~110.

『맹자』는 7 261, 3 5천 자 가량 됩니다『논어』의 3배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만 뽑았습니다.  곡속장이양역지以羊易之 부분입니다. 과 소를 바꾼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뽑은 이유는 역시 우리 강의의 주제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독법, 『논어』의 화동 담론, 그리고 『맹자』의 만남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 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하러 갑니다.” 혼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以羊易之) 지시한 적이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觫若 無罪而就死地)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생선 횟집에 들어가면서 수조 속 고기를 지적하여 주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집입니다.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사회의 인간관계는 대단히 왜소합니다. 인간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이양역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중략~

 

이처럼 우리 사회의 왜소한 만남은 도시의 과밀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 과밀성이 물론상당 부분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입니다.  더구나 장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맹자』 3 5천 자 중에서 이 곡속장 하나만 예시문으로 삼은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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