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70)
[8090 이 노래 이 명반]'봄여름가을겨울' 1집과 2집
반응형





내가 무지 좋아했던 뮤지션, '좋아하는'이 아니라 '좋아했던'!, 봄여름가을겨울.

예전에 한창 좋아할 때는 이들의 연주곡에 매료되어 듣고 또 듣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에는 내 취향이 변한 건지 이들이 예전만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들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식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간혹 뮤지션 봄여름가을겨울의 연주곡(특히 '못다한 내 마음을', '그대 별이 지는 밤으로', '페르시아의 왕자' 위주로)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우리나라 대중가수가 이런 아름다운 연주곡을 만들었지'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한다.


우연히 발견한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에 대한, 특히 나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시기에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의 음악이야기가 나온 신문기사 있어 옮겨본다.

그리고 신문기사 원문을 훼손하지 않은 채,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각주'기능을 이용하여 적어본다.



[8090 이 노래 이 명반] 10. '봄여름가을겨울' 1집과 2집

신선한 충격 그 이상의 감동 준 K-퓨전 '신호탄'


입력 : 2015-09-02 [19:03:14]

수정 : 2015-09-03 [10:41:11]

게재 : 2015-09-03 (33면)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일구어낸 1980년대 가요는 우리 가요의 동력이자, 큰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1988년, 온 나라가 온통 올림픽 개최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해 있던 그 해 초 여름 봄여름가을겨울이 출현했다. 이들은 조용필이, 들국화가 그랬던 것처럼 충격과 감동을 선사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은 1980년대를 상징하는 음악적 아이콘이자 오피니언 리더의 한 축이었다.

 


■ 신선한 충격, 그 이상의 감동 1집 

봄여름가을겨울의 두 남자, 김종진과 전태관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정원영의 지인들이 방배동의 한 주점에서 가진 1982년 송별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교류를 이어나가던 두 사람은 1985년 김현식의 백밴드로 결성된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가 된다. 이 팀에는 두 사람과 절친한 친구가 되는 유재하와 '빛과 소금'의 멤버인 장기호와 박성식이 몸담기도 했다.



김현식의 백밴드로 만난 김종진·전태관  

퓨전 재즈 시대 연 1집 서서히 주목 받아  

연주 지망생들에게 롤모델이자 교과서  

김종진의 탁월한 송라이팅 능력 돋보여 


그저 무대에 선다는 흥분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김현식을 보필했던 이들은 1987년 10월 김현식이 '들국화'의 전인권 허성욱, '부활'의 김태원, 이승철 등과 함께 대마초 흡연 혐의로 전격 구속되자 위기를 맞는다. 팀이 공중분해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때 김종진은 베이시스트 송홍섭의 소개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된다.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어했던 그는 결국 마음이 통했던 친구 전태관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물려받아 팀을 꾸려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사람의 행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들은 연습에 매달렸고, 불꽃 같은 열정으로 음반 작업에 착수했다.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한 김종진에게 영감을 준 것은 김현식이었다. 훗날 언론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그는 김현식에게서 그냥 솔직하게 노래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전문적으로 노랫말을 쓴 적도 없었고, 쓰게 될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노래처럼 솔직하게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랫말로 녹여내게 된다. 다분히 아마추어적인 발상이었지만 김종진, 그 자신도 몰랐던 그의 천재성은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이윽고 1988년 6월 15일 역사적인 첫 번째 정규 음반이 발매되었다.


음악으로 사계절을 그려낸 봄여름가을겨울의 1집은 이들의 야심작이었다. 퓨전 재즈라는 장르가 낯설게만 느껴졌던 우리 가요계에 퓨전 재즈 시대를 열어보인 것이다. 서서히 이들의 음악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더불어 소위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의 주목도 끌게 되었다[각주:1].


신선한 충격 그 이상의 감동을 주었던 1집은 기존의 가요 어법을 무시하는 듯 보컬곡이 아닌 연주곡으로 포문을 연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해방감을 선사하는 풍부한 사운드, 탄탄한 연주가 절로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화끈하고 다이나믹한 오프닝 곡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이 곡은 이 음반에 담긴 또 하나의 연주곡 '거리의 악사'와 함께 한국 가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다[각주:2]. 이 곡들은 K-퓨전의 신호탄이다. K-퓨전의 역사는 이곡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헤어지긴 정말로 싫어', '내가 걷는 길', '방황',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각주:3]' 같은 곡은 채워지지 않는 청춘의 허전함을 대변하는 곡들로 고뇌하고 아파하는 청춘 김종진과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김종진의 탁월한 송 라이팅 능력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는 갓 데뷔한 그룹의 노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원숙한 내공이 느껴지는 명곡이다. 음반에 수록된 10곡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은 CD로 발매되면서 보너스로 추가된 곡. 신촌블루스 2집 음반에 담겼던 곡이다) 모두는 명연으로 수많은 연주 지망생들에게 롤모델이 되었고, 교과서가 되었다. 특히, 두 사람의 친한 친구였던 고(故) 유재하에게 바친 곡 '보고 싶은 친구'는 김종진이 '눈물로 만들고, 가슴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 창조적인 음악의 진화, 새로운 비상 2집 

봄여름가을겨울은 1집으로 가요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지만 그들이 체감할 정도의 피드백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때 이들은 가수 한영애의 공연에 게스트로 출연했고, 이 공연에서 의욕을 찾고 자신감을 회복한다.


다음은 전태관의 회상.

"밥벌이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무대에서 관객들의 환호를 맛보고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모티브를 찾았다. 그 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다."


그 후 발매한, 1989년 10월 5일 내놓은 2집은 1집의 연장선상인 동시에 새로운 비상을 시도한 역작이다. 내실을 다지면서도 자기들만의 보다 독창적인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2집 역시 10곡을 담고 있고, 1집과 마찬가지로 3곡의 연주곡을 담고 있으며, 첫 번째 트랙도 연주곡이다. 연주진은 기타에 김종진, 드럼에 전태관, 베이스에 송홍섭을 기본 축으로 하여 키보디스트 김효국, 피아니스트 최태완, 색소포니스트 정원용이 가세해 사운드의 질감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봄여름가을겨울 1집.봄여름가을겨울 1집.


음악이 사람의 마음마저 정화시켜야 한다는 음악지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노래로 그것을 실현해보이겠다는 청사진을 펼쳐 보여주고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소박하지만 거창한 바람을 담은 곡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각주:4]'. 한국형 하이브리드 음악의 효시격인 곡 '어떤 이의 꿈[각주:5]'은 봄여름가을겨울을 인기 그룹의 반열에 올려놓은 히트곡.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에 흥겨운 펑키 리듬, 록과 재즈가 범벅된 사운드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국 펑키 록의 클래식 넘버, 김현식이 불렀던 곡을 보다 리드미컬한 사운드로 새롭게 편곡해 노래하고 연주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비롯해 '쓸쓸한 오후', '내 품에 안기어', '그대 별이 지는 밤으로[각주:6]',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오면', '열일곱 그리고 스물넷', '사랑해', '못다한 내 마음을[각주:7]' 등 다시 한번 김종진의 탁월한 송 라이팅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2집 앨범 표지.


봄여름가을겨울의 1집과 2집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걸작들이었다. 이 땅에 K-퓨전의 새 역사를 열어보였던 봄여름가을겨울은 10년에 걸쳐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단 두 장의 음반에서 다 보여주고 말았다. 그만큼 이 두 장의 음반에는 그들만의 농축된 음악성이 100% 발현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의 음악이 긴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 젊음의 숨결을 진정성있게 담아냈기 때문이리라. 최성철·페이퍼레코드 대표

기사 출처 : 부산일보



참고로 위 기사가 실린 부산일보에서는 [8090 이 노래 이 명반]기획물이 연재되고 있다.

부산일보 웹사이트에서 검색어 '8090 이 노래 이 명반'으로 검색하면 금일 현재 총24건의 기사물이 실려있다.

이 기획물에는 봄여름가을겨울 뿐만 아니라 푸른하늘, 들국화, 공일오비, 무한궤도, 이문세 등 8~90년대를 풍미했던 음악을 다루고 있다.

종편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 때문에 지난 추억을 회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은 위 기획물을 한번 읽어 보고 선곡해보길 바란다.


이전 관련글 보기  

 - 진솔함이 빚은 아름다운 노래 '봄여름가을겨울'


 - 봄여름가을겨울 - 못다한내마음을


 - 봄여름가을겨울 - 그대, 별이 지는 밤으로


 - 봄여름가을겨울 - 거리의 악사


 - 봄여름가을겨울 - 항상 기뻐하는 사람들


 - 봄여름가을겨울 - 페르시아 왕자


 - 봄여름가을겨울 - 그대 별이 지는 밤으로




  1. **** 그럼 나도 '소위 음악 좀 듣는 사람'축에 속했던 걸까...? [본문으로]
  2. ***** 지금도 연주곡 '항상 기뻐하는~~'과 '거리의 악사'의 리듬이 헷갈린다. [본문으로]
  3. **** 내가 봄여름가을겨울 노래들 중 맨 처음으로 좋아했던 노래다. [본문으로]
  4. **** 노래 제목처럼 이 연주곡은 정말 아름답다. 근데 아무리 들어도 그 리듬이 머리속에 기억되지 않더라...아직도 리듬을 기억할 수 없다. 들을 때는 리듬에 흠뻑 젖은체로 듣다가 곡 끝나면 리듬에 대한 기억이 없다. 마치 머리가 포맷된 것 처럼 말이다. [본문으로]
  5. ****** 당시 나의 친구들은 그룹'봄여름가을겨울'을 잘 몰랐다. 다만 '어떤이의 꿈'이라는 노래는 알고 있었다. [본문으로]
  6. ***** 이 연주곡은 초여름 혹은 초가을 밤에 들으면 제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왜 초여름이나 가을이냐구... 창문을 활짝 열어 제끼고 들어야 하는데, 추우면 음악이고 뭐고 없다. 그냥 창문 닫게 되니 말이다. [본문으로]
  7. **** 봄여름가을겨울의 연주곡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곡이라 생각한다. [본문으로]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응답하라 1988
반응형



아들을 데리고 나의 중고등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부산으로 길을 나섰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막상 나의 모교 중학교에 들어서니 쉽게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일어나는 뭉클함 때문에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 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친구보다 선생님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자꾸 기억이 났다.

내가 장난이 좀 심해서 선생님 속을 많이 썩여서 그런가 보다.


아들은 농구코트가 마음에 든다며 이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꼴랑 이 정도 가지고 마음에 들어하니...실망! 


응답하라 1984부산 남구에 있는 oo중학교


용두산타워,부산항,중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부산항


중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경치가 좋았나?!.

저 바다 건너편에 있는 용두산타워가 선명하게 보였다.



부산 남구에 있는 oo고등학교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나의 고등학교 모교에 갔다.

내가 1회 입학생이였으니 벌써 27여년 정도 흘렸는데, 건물이 굉장히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역시 좋은 재단에서 운영하니 이래저래 정성을 기울이는게 눈으로 보인다.

 

근데 생각해 보니 학교들은 별로 변하게 없는 것 같다.

물리적 시간이 흐른 것에 비하면 외형들은 거의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길거리나 주택들은 많이 변해 버렸다.

각각의 골목을 지날 때마다 그 장소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조금씩 조금씩 떠오를 때마다,

왜 그리 가슴 뭉클하던지.....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인생을 다른 길로 전환 할 수 있을텐데.....많이 서글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그 집앞이다.


나의 십대와 이십대 중반까지의 삶이 녹아 있는 그 집앞이다.

농사 짓는 아버님께서 아들 마음 편히 공부해라고 구입하신 집이다.

지금은 남의 집이 되었지만.......예전 그 모습 그대로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테니스코트,타이어뱅크,쉐보레 자동차서비스센터,유엔로타리테니스코트가 있었던 그 곳!


유엔로타리 지나면서 옛 기억이 하나 더 떠올랐다.

사진에 보이는 '타이어 뱅크'와 '쉐보레 자동차 서비스센터'가 있는 곳이 테니스장이였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번외

쌍둥이돼지국밥,대연동쌍둥이돼지국밥,부산쌍둥이돼지국밥쌍둥이돼지국밥

응답하라 1980's를 함께 한 아들을 위해 내가 극비로 찾아간 곳,

바로 대연동에 있는 "쌍둥이돼지국밥"!!!!

Oh My God!!!!!

대기행렬이 거의 15m 정도.......

아들이 말하길

"이렇게 줄을 서서 먹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이 인근에 있는 '왕돈까스 무한리필'가게에 가서 점심을 떼웠다.




언젠가는 중고등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을 한번 찾아가리라 했었는데,

가끔은 그럴 기회 혹은 방향이 엇비슷해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발걸음 했을 수 있었는데,

애써 외면해 왔었다. 그냥 보기 싫었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이렇게 한번 훌쩍 둘러보고 오니,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다.

이 감정이 뭔지를 모르겠다.


이전 관련글 보기  

 - 혼자 몰래 먹어야만 했던 부산 맛집 - 부원 보리밥


 - 요즘 먹고 싶은 것들.......


 - 추억의 맛으로 달려가다 - 사천탕면


 - 갑자기 먹고 싶은 미숫가루


 - 갑자기 먹고 싶은 쏘야(소세지 야채볶음)


 - 추운 겨울밤에 생각나는 엉뚱한 먹거리


이후 연관글 보기  

2015/12/25 - 남자라면 이래야 한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비즈니스 모델의 개념을 바꿔준 '코끼리공장'
반응형

지난 토요일 운전 중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모델 사례를 알게 되었다.

지역아동센터나 유치원등에 장난감을 무료로 수리해 주는 사업을 하는 코끼리공장이라는 사회적 기업의 이야기이다. 창업 전 부터 아동보호기관의 고장난 장난감을 수리하거나, 수리된 장난감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전달하는 업무를 자원봉사 활동차원에서 했다.

코끼리공장,사회적기업,장난감 무료수리,코끼리공장 웹사이트 사진1


마침내 코끼리공장을 창업하긴 하였으나 회사운영비와 임금문제를 해소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장난감 무상 수리업무와 회사운영비용, 일정수준의 경제적 이득 확보라는 문제를 동시에 풀어내야만 지속가능한 기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일반적인 찾아내는 해결방법은 뻔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예를 들면 적은 돈이나마 수리비용을 받아내거나, 재생된 장난감을 판매한 이득을 운영비에 충당하거나, 지자체의 지원을 얻어내는 방법 등일 것이다. 아니면 종업원수를 줄여서 운영비를 최소화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코끼리공장 웹사이트 사진2


하지만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렸다.

이들은 지역아동센터 혹은 유치원과 같은 아동보호시설에 소독작업을 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위생에 취약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동보호시설은 정기적으로 소독처리를 실시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장난감을 수리하고 나면 소독작업을 그치게 되는데 이 부분을 코끼리공장의 경제수단으로 연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내용을 들은 나는 '아~'하고 감탄하고 말았다. 심지어 라디오 진행자도 그렇게 느낀 것처럼 들렸다.

장난감 수리 공정단계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소독처리'를 코끼리공장의 비즈니스 모델의 구심점으로 연결시킨 이들의 해법이 참으로 대단하다. 얼핏보면 이런 아이디어 만들어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지만, 막상은 해보면 이런 아이디어를 연결한다는게 쉽지만은 않다.

코끼리공장 웹사이트 사진3

사진출처 : 코끼리공장

통상적으로 본연의 활동(여기서는 장난감 수리)에 매몰되어 색다른 시간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본연의 활동이 가장 자신있는 분야라면, 그 분야를 중심기둥으로 굳건하게 세워놓고 나머지는 곁가지로 인식하게 된다.


이를테면

농사를 아주 잘 짓는 농사꾼이 있는데 농산물의 맛은 기똥차다.

근데 농산물의 가격이 너무 싸다. 농사짓는게 오히려 손해라고 한다면......

이 농사꾼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쉽게 떠오르는 방법은!

소비자와 직거래를 시도하거나 체험형 농장을 운영한다든지!


근데 이 방법은 웬만한 젊은 농부들이 이미 적용하고 있다.

그나마 먹고 살 정도의 이익은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만큼 노동력이 증가하거나 신경쓸게 너무 많아진다. 무엇보다 자본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다른 해법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있다면 같이 고민해 봤으면 한다.


독자 역시 쉽게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위에서 내가 말한 "이런 아이디어 만들어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반문할 지 모르겠지만, 막상은 해보면 이런 아이디어를 연결한다는게 쉽지만은 않다"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바로 이거다.

가장 자신있는 부분만 고수하지 말라는 것이다.[각주:1]

자신있는 부분을 곁가지로 삼을 수 있는 사고의 탄력성과 개방성을 활용하라는 것이다.


코끼리공장 이해자료

코끼리공장 웹사이트

코끼리공장 블로그

날개 없는 천사 코끼리 공장장, 장난감을 나누다



  1. **** 대부분의 경영서적에서는 "가장 자신있는 부분에 집중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가르침에 빠져 자유분방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본문으로]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김해통합도서관 야간 연장 운영변경
반응형

지난 토요일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이 끝난 후 간만에 김해화정글샘도서관에 갔었다.

도서관에서 노트북으로 자료 조사할 게 있었기 때문에, 자판 소리나 마우스 클릭소리에 주의할 필요가 없는 지하 학습실에 자리를 잡았다.


학습실 입구에서 운영시간 변경을 알리는 안내판을 발견하곤 난감했다.

김해화정글샘도서관,화정도서관,글샘도서관,운영시간 변경을 알리는 안내판


내용의 요점은 토요일과 일요일의 운영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밤11시까지 개방했으나 내년 1월2일부터는 저녁6시까지만 개방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일방적으로 도서관 운영시간을 단축하게 된 것인지, '책 읽는 도시'를 표방하는 김해시가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한 것이지 궁금했다.


그래서 김해시통합도서관 웹사이트를 통해서 확인한 결과, 김해시 시립도서관인 '화정글샘, 진영한빛, 칠암, 장유' 도서관 모두 내년 1월2일부터 토요일과 일요일의 운영시간을 단축하는 것으로 결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운영시간을 단축하게 된 이유를 알고 나니 기분이 더 상했다. 그 이유라는게 '국가 지원 예산액 감소'라는 것이다.


부자감세와 기업프랜들리 정책 등으로 기존 기득권자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반면,

힘없는 노동자 혹은 근로자에게 야금야금 세금 증액시키고자 하는 정부가 미운데!

예산부족하며 복지정책 예산액을 삭감하면서 오히려 국민들에게 어려움을 감내하라고만 하는데!

이게

서민을 위한 정부인가?

국민을 섬기는 정부인가?


리더의 가치관과 철학에 따라 그 조직의 지향점 혹은 목표가 좌우되기도 한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문화에서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바라볼 때 확실히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

 

다음 대통령은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다른 인성을 가지신 분이 당선되어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 화정글샘도서관 야간연장운영 "변경" 실시 ★


공공도서관 개관시간 연장지원 사업 국비 지원 감소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 권장사항(주5일, 22시까지)에 근접하도록 주말(토~일) 야간에 도서관을 부득이하게 단축하여 운영하고자 합니다. 시민 여러분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 평일(월~금)에는 종전대로 23시까지 운영합니다.^^


 ○ 시 행 일 : 2016. 1. 2(토) ~

 ○ 운영요일 : 월요일 ~ 일요일(정기휴관일, 법정공휴일 제외) 

 ○ 운영시간(토~일)

       - 인문자연과학실, 예술어문학실 : (기존) 09:00~23:00 → (변경) 09:00~18:00

       - 학습실 : (기존) 08:00~23:00 → (변경) 08:00~18:00

 ○ 운영내용 : 도서대출 및 반납, 열람, 타관대출 등

 ○ 문      의 : 화정글샘도서관 ☎ 330-2992~4, 2972~4


+++++ 진영한빛도서관 자료실 야간 연장 운영 변경 시행 안내 +++++


▶ 변경사유 : 2016년 공공도서관 개관시간 연장지원 사업 국비 감소

▶ 변경시행일 : 2016. 1. 2.(토) 부터


▶ 변경사항


 <<어린이자료실(1층)>> 

 0. 당초 → 평일(월~금), 주말(토,일) : 09:00 ~ 21:00

 0. 변경 → 평일(월~금), 주말(토,일) : 09:00 ~ 18:00


 <<종합자료실(3층)>>

 0. 당초 → 평일(월~금), 주말(토,일) : 09:00 ~ 23:00

 0. 변경 → 평일(월~금) : 09:00 ~ 23:00, 주말(토,일) : 09:00 ~ 18:00


  ※ 종합자료실 평일(월~금)은 기존 운영시간(09:00~23:00)과 동일


★  [칠암] 2016년 주말 야간 운영시간 변경 안내  ★


 ※ 도서관 야간 운영사업의 국가 지원 예산이 작아짐에 따라 부득이 다음과  같이 주말 야간 개관을 축소하여 운영코자 하오니 시민분들의 양해를 바라며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 시 행 일 : 2016. 1. 2 (토요일) ~

 

 ◆ 운 영 일 : 월 ~ 일요일 (법정공휴일, 마지막주 월요일(휴관일) 제외)


 ◆ 변경자료실 : 인문학실(2층), 사회자연과학실(4층)


 ◆ 변경 내용 

  ○ 월 ~ 금요일  : 09:00 ~ 23:00  ☞ 기존과 동일

  ○ 토 ~ 일요일  : (기존) 09:00 ~ 23:00  ☞ (변경) 09:00 ~ 18:00


 ◆ 문 의 : 칠암도서관    ☎ 330 - 4591


【장유도서관 야간 운영시간 변경(축소) 안내】


  2016년도부터 김해시통합도서관 야간운영사업의 국가지원 예산이 감소됨에 따라 주말야간 운영시간을 아래와 같이 변경(축소) 운영 하오니 시민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 변경시행일 : 2016. 1. 2.(토) 부터


    □ 변경자료실 : 인문자연과학실, 예술어문학실, 학습실


    □ 변경사항

      ○ 당초 → 평일(월~금), 주말(토~일) : 18:00~23:00 

      ○ 변경 → 평일(월~금) : 09:00 ~ 23:00

                     주말(토~일) : 09:00 ~ 18:00


    □ 문의전화 : ☎330-7451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특허 출원 무료로 해보기
반응형

아들이 올해동안 영재교육원 발명반 수업에 참가했다.

그간의 학습 결과을 반영한 '산출물 발표회'에 아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를 발표했다.

담당 지도 선생님으로부터 특허 신청을 해 보라는 말씀을 듣고, 이 기회에 특허 출원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조사한 내용을 블로그를 통해 정리한다.


특허청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특허 출원 절차를 간략하게 알아보면 아래 그림과 같다.

특허,특허출원,특허심사,특허청,특허 출원 및 심사 절차도

이미지 출처 : 특허청


옮겨 놓고 보니 간단하지 않은데, 거칠게 정리를 하면 다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출원절차 : 준비한 명세서를 바탕으로 출원서를 작성하여 특허청에 제출하는 과정

* 심사절차 : 제출한 명세서를 토대로 심사관이 특허등록 요건에 충족하는 심사하는 과정

* 등록절차 : 심사관에 의해 등록가능이 판단되면 등록료 납부를 거쳐 특허를 등록하는 과정


특허출원 방식으로는 크게 2개로 대변된다.

첫째, 나홀로 진행하기

둘째, 변리사를 통해 진행하기

각각 다름대로 장단점이 있기에 뭐가 좋다라고 잘라서 이야기 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행정절차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누군가(?)를 끼고 일을 진행해야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심지어는 누군가(?)를 끼고 일을 진행하면 안 될 것 같은 일도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그 누군가인 변리사 사무실이나 특허관련법인에 의뢰하게 된다.

물론 변리사사무소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특허등록과정에서 이들이 없으면 결코 안될 경우가 많은게 사실이고 이것이 이들의 존재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들의 경우는 경험삼아 신청해 보는 수준이기에 변리사사무소를 통해 특허등록을 의뢰하기에는 금액적으로 부담되는 게 사실이다. 대략 120~200만원 정도 규모이니 무턱대고 덤벼들 일이 아닌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무료로 특허등록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다.

한국지식재산보호협회와 대한변리사회를 통해서 무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 한국지식재산보호협회 웹사이트 접속 후 화면 상단의 "공익변리사 특허상담센터"코너에 있는 내용 참조!

* 대한변리사회 웹사이트 접속 후 화면 좌측의 "무료변리"코너에 있는 내용 참조!


다만 무료 대상은 아래와 같이 한정되어 있다.

[ 무료변리의 대상 ] = 무료 특허등록의 대상

1. 학생[각주:1]

초등~대학의 재학생(초·중등교육법 제2조, 고등교육법 제2조의 규정에 따른 학교의 재학생)

단, 휴학생 및 대학원 재학생 및 만 30세 이상의 학생 제외

2. 기초생활수급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2조 제2호의 규정에 따른 수급자

3. 국가유공자 및 그 가족

국가유공자등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및 제5조의 규정에 따른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

4. 장애인

장애인복지법 제32조 제1항의 규정에 따라 등록된 장애인

5. 중소기업


[ 무료변리의 범위 ] = 무료 특허등록의 범위

1. 출원에서 등록까지

2. 1인당 1년에 1건만 신청

3. 학생, 국가유공자, 장애인, 기초생활수급자는 특허·실용신안에, 중소기업은 최초특허출원으로서 특허로 한정(디자인, 상표 제외)


[ 필요한 서류 ]

1. 학생

(가) 무보수대리인선임신청서

(나) 발명의 요지설명서, 도면

(다) 재학증명서

(라) 확인서(교장 또는 학과장 이상의 직인 필요)

(마) 주민등록등본 또는 가족관계증명서

(바) 위임자(만19세 미만)

2. 기초생활수급자

(가) 무보수대리인선임신청서

(나) 발명의 요지설명서, 도면

(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증명서류

3. 국가유공자 및 그 가족

(가) 무보수대리인선임신청서

(나) 발명의 요지설명서, 도면

(다) 국가유공자증명서

4. 장애인

(가) 무보수대리인선임신청서

(나) 발명의 요지설명서, 도면

(다) 장애인증명서 또는 복지카드(앞뒷면) 사본

5. 중소기업

(가) 무보수대리인(중소기업)선임신청서

(나) 발명의 요지설명서, 도면(도면포함 작성 CD 1개)

(다) 법인등기부등본

(라)사업자등록증 사본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고 아들 녀석과 같이 이야기 하면서 차근차근 진행해야 겠다.

근데 마눌님이 서둘러라고 잔소리다~!

     


  1. * 아들이 초등학생이니 조건에 충족된다. [본문으로]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김해 맛집 - 통큰 대구막창
반응형


초등 6학년생인 아들이 초등학교 마지막 기말고사공부하면서 내내 입에 달고 뱉은 말이 바로 "막창 먹고 싶다. 막창 먹고 싶다" 였다. 생뚱맞은 것은 아들이 막창을 한번도 먹은 적이 없는데 더군다나 막창이 어떤 맛인지 어떤 부위인지도 모른 체 허구한 날 막창을 노래하니 이상했다.

기말고사를 엉망으로 망쳤지만 아들은 의기양양하게 막창 먹으러 가자고 보챘다.

통큰 대구막창,막창구이,김해 맛집,△ 초벌구이 후 나오는 생막창과 오겹살 @통큰 대구막창


나 역시 막창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들을 핑계삼아 평소에 찜해둔 막창구이 전문점에 갔다.

가게 이름은 '통큰 이가(李家) 대구막창'이다. 그냥 '통큰 대구막창'으로 불리는 곳이다.

막창하면 대구가 유명한데, 오죽하면 막창골목이 있어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다.

'통큰 대구막창'은 대구를 본점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이다.


Tip

막창에는 두 종류가 있다. 돼지막창과 소막창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막창이라고 하면 돼지막창을, 소막창이라고 하면 소(음~메에)막창이라고 한다.

소막창구이 돼지막창구이에 비해서 약간 질기다. 가격은 돼지막창이 저렴하다(1인분 150g기준으로 약1~1.5천원 저렴하다).


△ 위 사진 중 종지위에 담긴 소스에 오겹살을 찍어 먹는다.


달궈진 불판 위에 초벌된 막창(돼지막창)과 오겹살을 올려 놓았다.

감자와 마늘도 살짝 구워 먹으면 맛이 좋았다.



'된장 소스'가 무조건 옳다.

막창소스,된장소스,막창,△ 잘 익은 막창을 된장 소스에 찍어 먹다.


'된장 소스'의 주요 기능은 짭조름한 맛이 식욕을 당기고, 막창구이의 느끼한 맛을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ㅋㅋ) '잡아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막창을 먹었던 김해 삼계에 있는 그곳 된장소스의 맛보다는 떨어지는 수준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창에는 '된장 소스'가 무조건 옳다.

오겹살,삼겹살,삼겹살 소스△ 오겹살을 전용 소스에서 살짝 찍어먹다.


아까 올려둔 종지의 소스가 보글보글 끓고 나면 잘 익은 오겹살을 살짝 찍으면 이 맛 또한 기차다.


'된장찌게'가 무조건 옳다


'병 주고 약준다'는 말이 이 날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막창에다 오겹살을 배불리 먹고나니 약간 더부룩하기도 하고 느끼한 기분이 살짝 들기에 우리는 바로 된장찌게를 주문했다. 꽃게가 들어가서 그런지 시원한 맛이 나서 좋았다.

이렇게 먹고 나니 배만 부르지 않았으면 막창과 오겹살을 또 시켜 먹고 싶어졌다.

좀전의 더부룩 느끼한 느낌은 된장찌게 덕분에 훌훌 사라졌기 때문에~!



거의 완벽하게 비워진 된장찌게, 나는 비워진 음식용기를 사진을 거의 찍지 않는다.

지저분한 모양새를 굳이 사진으로 담아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이날을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날이였다.



경상남도 김해시 김해대로 2529번길 55

경상남도 김해시 삼정동 637-2

055-338-1436


이전 관련글 보기  

 - 김해 먹거리 - 남광식당(곱창, 낙지전골)


 - 김해 먹거리 - 팔복돼지국밥


 - 김해 먹거리 - 동강 민물메기매운탕


 - 김해 먹거리 - 화포메기국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반응형



출처 :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인터넷에 꽤 많은 펌글들이 검색이 되는 바, 처음 인터넷에 게재된 곳이 어디인지 출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레이의 VBA정복기9- 변수란 무엇인가1
반응형

레이의 VBA정복기9- 변수란 무엇인가1


[ 용어정리 ]

Dim : '선언하다'라는 의미로서 변수 등을 지정할 때 본 용어를 사용한다.

변수 : 아래 예문에서 나오는 'x,y,k'가 변수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1 + 2 =3'이라는 수식에서 1~3은 변수로서 말 그대로 변하는 숫자다.

As : 영어 단어로서 생각해 보면 '~~~로써'이다.

'x As Integer'를 그대로 해석해보면 '변수 x 는 정수로써'이다.

편의상 '~~~이다'로 이해하면 된다. 즉 '변수 x는 정수이다'로 이해하면 된다.

'


 Dim x As Integer 

위 내용을 바탕으로 Dim x As Integer를 해석하면, '변수 x를 정수로 선언하다'로 보면 된다.



예문1.

Sub Ingeter변수란무엇인가()

Dim x As Integer

Dim y As Integer

Dim k As Integer

    

x = Sheets("sheet1").Range("B1").Value

y = Sheets("sheet1").Range("B2").Value

k = x* y

Sheets("sheet1").Range("B3") = k

End Sub


예문2.

Sub Double변수란무엇인가()

Dim x As Double

Dim y As Double

Dim k As Double


x = Sheets("sheet1").Range("A1").Value

y = Sheets("sheet1").Range("A2").Value

k = x * y

Sheets("sheet1").Range("A3") = k

End Sub


위 두 예문의 차이점은 변수의 종류를 예문1에서는  Integer를, 예문2에서는 Double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변수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한다.




[ 변수의 종류 ]

 Integer 

정수형 데이터 형식으로서, '-32,768 ~ 32,767' 사이의 정수형 데이터가 사용범위이다.

소수점이 있는 데이터는 사용할 수 없다.



 Long 

역시 정수형 데이터 형식으로서, '-2,147,483,648 ~ 2,147,483,647' 사이의 정수형 데이터가 사용범위이다.

Integer와 마찬가지로 소수점이 있는 데이터는 사용할 수 없다.



 Single 

실수형 데이터 형식으로서, 비교적 작은 숫자를 사용할 수 있다(정확한 범위는 잘 모르겠다).

Integer와 Long변수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소수점이 있는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

 


 Double 

실수형 데이터 형식으로서, 큰 숫자를 사용할 수 있다.

소수점이 있는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데 Single보다 더 큰 숫자가 들어갈 수 있다.



 String 

문자열 데이터 형식을 변수일 때 사용할 수 있다.

 


 Variant 

가변 데이터 형식으로서 정수형, 소수점이 있는 실수형, 문자형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위 변수 이외에는 몇가지가 더 있으나 이것들은 패스한다.


이전 관련글 보기  

 - VBA 정복을 위한 출사표를 던지다.


 - 레이의 VBA 정복기1 - VBA란 무엇인가?


 - 레이의 VBA 정복기2 - VBA 구성요소


 - 레이의 VBA 정복기3 - 프로시저의 종류 알아보기


 - 레이의 VBA 정복기4 - 개체와 컬렉션 알아보기


 - 레이의 VBA정복기5- 엑셀 개체 다루기1


 - 레이의 VBA정복기6- 숫자를 한글 또는 한자로 변환하는 법


 - 레이의 VBA정복기7- 숫자를 영어로 변환하는 방법


 - 레이의 VBA정복기8- Vlookup 사용하기


이후 연관글 보기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최근 작성 글
최근 작성 댓글
최근 작성 트랙백
프로필
공지사항
글 보관함
캘린더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TODAY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