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25)
이제 이런 책을 읽어도 되겠지
반응형

오늘 현 혹은 전직 공인중개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빌려왔다.

지난 27회 공인중개사 시험을 가채점한 결과,

무난히 합격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맨 위 책은 아들용으로 빌려왔다.



아마도 불합격 가능성은 박근혜 지지율(5%)의 10분 1일 확률보다 낮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런 책을 읽어도 된다.


아직 책을 본격적으로 읽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내용이 부담없어 읽기 무난할 것 같다.

또한 당장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개업할 것 아니니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공인중개업 현장의 단순한 노하우(글 표현상 '단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일 뿐... 종사자들의 노하우는 하루 아침에 습득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가 아니라 돈 되는 부동산을 알아보는 동물적 감각을 체득하고 싶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런 감각은 그냥 타고 나야 한다는 것을.....

사람이 돈을 쫓아 가는 게 아니라,

돈이 그 사람을 쫓아 오게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만 노력하면 동물적 감각은 아니라도 좋으니 지금 나의 안목을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

가능하겠지!?!!!!!!!!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스님의 공부법
반응형

기대가 너무 지나쳤던 것일까.....

책 제목이 예비 독자를 유혹하기 딱 좋았다.

특히 나 처럼 불교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는 불자(佛者)라면 더 그렇다.

스님의 공부법스님의 공부법

전체적인 소감은 임팩트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또한 공부법에 대한 신선한 노하우도 없었다. 필승 전략도 없었다.

학업(통상의 제도권 학습)을 이어가시는 스님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딱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스님의 공부 목적과 현실의 수험생 혹은 직장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궁극적으로 측면에서는 이 책의 공부법이 옳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과 괴리가 크다.

마치 누군가가 공 & 사교육의 문제점을 설파할 때면 

학부모들은 맞장구를 치다가, 곧 원위치로 돌아가버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의 학습법은 성적을 따질 필요없는 혹은 합불합격이 없는 분야에 적용해 보면 재미날 것 같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5/15 -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반응형

책의 두께에 압도되기도 했고(꼴랑 420여 페이지...),

중국 고전이 전하고자 하는 고매한 가르침을 찾아내기가 나로서는 역부족이였기에,

쉽사리 속도를 올리지 못한 책,

담론(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에서 소개된 『맹자』에 나오는 ‘이양역지以羊易之' 이야기에서는 저자가 던져주는 가르침과 함께 나만의 해석을 가미할 수 있었던 부분이라 이렇게 정리해 본다.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선왕이 종(鐘)을 만드는 과정에 제물로 바쳐질 소 한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소가 벌벌 떠는 모습을 안타까워한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삼아라!"고 지시했다.

선왕이 소 대신에 양을 제물로 택한 이유는 불쌍한 소를 봤고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불쌍한 소를 봤다 = 선왕과 소의 관계가 형성 됐다.

→ 불쌍한 양의 모습은 보지 않았다 = 선왕과 양의 관계 형성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관계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유무에 따라 생사조차도 좌우될 수 있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논리(가르침)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발생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대한민국에서는 관계를 악용하는 성향이 아주 강하다.

학연, 혈연, 지연 등으로 얼룩진 어두운 단면들이 선명하다.

우리나라는 능력보다 학연, 혈연, 지연이 우선되는 그런 사회이다.

다행히 요즘은 이런 성향이 다소 사라지는 것 같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하다......


오히려 맹자의 '이양역지'를 잘못 이해한 나머지

결정권자(예를들면 대통령, CEO,....)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중요 요직에 배치하거나,

(그 누구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자기의 사리사욕만 챙기는 사람)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채용하는

(그 누구는 업무경력이 없으며 팀웍도 부족하며 앞으로도 이 단점이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이런 실수를 범할 위험을 안고 있음을 염두해 두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 신영복 담론 ]

 

P106 ~110.

『맹자』는 7 261, 3 5천 자 가량 됩니다『논어』의 3배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만 뽑았습니다.  곡속장이양역지以羊易之 부분입니다. 과 소를 바꾼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뽑은 이유는 역시 우리 강의의 주제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독법, 『논어』의 화동 담론, 그리고 『맹자』의 만남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 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하러 갑니다.” 혼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以羊易之) 지시한 적이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觫若 無罪而就死地)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닙니다. 생선 횟집에 들어가면서 수조 속 고기를 지적하여 주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가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집입니다.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사회의 인간관계는 대단히 왜소합니다. 인간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이양역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중략~

 

이처럼 우리 사회의 왜소한 만남은 도시의 과밀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 과밀성이 물론상당 부분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의를 그렇게 끝낼 수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는 누가 만들었나를 물어야 합니다.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입니다.  더구나 장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맹자』 3 5천 자 중에서 이 곡속장 하나만 예시문으로 삼은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5/13 - 대통령의 글쓰기

2016/05/03 - 생각하는 인문학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4/12 - 김대식의 빅퀘스천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반응형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0) 2017.04.21
실전 기획부동산  (0) 2017.04.01
허접한 꽃들의 축제  (0) 2017.03.01
스님의 공부법  (0) 2016.06.01
대통령의 글쓰기  (2) 2016.05.13
생각하는 인문학  (2) 2016.05.03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 2016.04.17
김대식의 빅퀘스천  (0) 2016.04.12
  Comments,     Trackbacks
생각하는 인문학
반응형


생각하는 인문학 / 이지성 지음생각하는 인문학 / 이지성 지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흥분과 설레임을 잊을 수 없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필(Feel)이 와닿는 부분을 펼쳐 한자한자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그 첫부분은 '격물치지'에 대한 이야기였을 거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내용이 너무 좋았다.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완전한 앎에 이르다'는 의미인 '격물치지'!!!!

격물치지의 자세로 인문학을 배운다면 분명 나에게도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심으로 읽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 나의 뇌에서 파열음이 흘러 나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책쓴이가 '끼워맞추기'를 하고 있다는 의문에서 비롯된 의문 음(音)이 자꾸 일어났다. 

읽을수록 그 음의 발생주기는 짧아졌다.


동서양의 천재 혹은 성공한 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인문학'에 심취했었다면서 인문학을 배우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에만 치중한 내용이였다.


설령 실제로 '동서양 천재들이 인문학을 배웠다'하더라도 그들의 천재성이 오로지 인문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부족하고 억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은 인문학을 제대로 접하지 않았기에 실패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저자의 논리도 영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천재성 내지 성공에 있어서 인문학적 지식은 충분조건도 필수조건도 아닌 것 같다.

인문학이 성공의 충분요건도 아니며 필수조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공은 여러 학문, 자질, 능력, 테크닉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대 흐름에 부합할 때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것이므로 딱 잘라서 인문학 때문에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만사 급변하는 요즘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간이란 급류에 떠내려가는(그저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지울 수 없다.

남들은 떠밀려 살아갈 때 나는 스피디한 세상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가고 싶다.

중심잡기에 가장 도움이 되는 학문이 인문학일거라는 생각에 근래 인문학관련(종교서적 포함) 서적을 읽고 있다. 중심잡기를 통해서 '참다운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인문학이 다시 집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망구 내 생각이자 추측이다. 어쩌면 저자의 주장이 옳을 수 있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17 -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016/04/12 - 김대식의 빅퀘스천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반응형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접한 꽃들의 축제  (0) 2017.03.01
스님의 공부법  (0) 2016.06.01
신영복 담론 中 곡속장 '이양역지'편을 읽은 후  (0) 2016.05.15
대통령의 글쓰기  (2) 2016.05.13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 2016.04.17
김대식의 빅퀘스천  (0) 2016.04.12
붓다의 치명적 농담  (0) 2016.04.01
책은 도끼다  (0) 2016.04.01
  Comments,     Trackbacks
김대식의 빅퀘스천
반응형

쉬운 듯 어렵게 읽은 '김대식의 빅퀘스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잡을려고 안간 힘을 다 했지만, 잡생각만 나게 했던 책. 


김대식의 빅퀘스천김대식의 빅퀘스천


어쩌면 나는 이 책에서 '인공지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는지 모른다.

저자 김대식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롭다고.'라는 문구에서 한참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명쾌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나는 복사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복사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미래의 모습을 얼핏 내다볼 수 있었다. 


이 책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인간탐구서 혹은 철학서인 것 같다. 

마치 인간은 누구인가, 

생각이라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와 같이 소화해내기 난해한 질문을 던져 놓고 과학과 철학 지식을 줄줄 풀어 놓는다.

그러니 텍스트를 이해는 커녕 쫒아 읽어내기 힘든 상태였다.


시간이 흘러흘러 나의 지식과 사고가 높아지더라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016/03/12 - 돼지가 있는 교실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붓다의 치명적 농담
반응형

에세이처럼 읽혀지는 보기드문 불교서적


대개 우리는 불교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불교 교리의 자체 특성도 그러하지만, 이를 알려주는 책 혹은 강좌의 딱딱함도 이런 인식에 한 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에 내가 읽은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이라는 책은 딱딱한 불교공부(금강경)를 물 흐르듯 풀어가기에 흥미진지하게 읽어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붓다의 치명적 농담


'책은 도끼다'에서 '붓다의 치명적인 농담'이라는 책을 소개하여 단숨에 읽어 버렸다. 

불교는 이거다라고 압축해서 알려주는 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P212부분). 

이 책은 박웅현스타일로 읽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재독 삼사독 하면 할수록 또 다른 깊은 깨달음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 주요 발췌문 ]

P24.

저는 불교의 이치를 다루되, 그것도 아주 낮게’, 어디까지나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설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너무 수준높은 논의에, 옛 한문의 거친 어법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을 대중들에게 작은 위로와 이해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강의를 시작합니다.

 

P162.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줄여야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내 식으로 판단해왔다.  그 바탕에는 나의 존재를 보존 확장시키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깊이 작용한 듯하다.  이제부터 나도 모르게 벤 나의 편견과 습관, 관심과 이해관계 등의 개입을 반성하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을 해나가야겠다.” 이런 작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합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의 영향력을 줄이고, 내적 자유의 폭을 확대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팔정도로 알려져 있고, 또는 이를 계정혜의 삼학으로 정돈하기도 합니다.

 

P163

아비달마의 오래된 지혜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소유는 세계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밀어붙인 강제입니다.  이 강제로 하여 본래 평화롭던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위협받고 깨어졌습니다.  이 오래된 습성을 고쳐야만 본래의 고요. 즉 열반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문장들은 전부 다 소유의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술부는 주부를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모두 소유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달마는 로 시작되는 문장과 어법들을 오류투성이의 작문으로 단정하고, 그것들을 를 뺀, 순수 객관적 서술로 바꾸어나갑니다.  이 전략은 나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 객관적 사태를, 즉 다르마dharma(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우리는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보냈다는 문장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아비달마는 이것을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쳐줍니다.

 

1)      물체가 있다.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이 있다.

3)      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하는 과정이 있다.


P168

세상의 점착으로부터, 아니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해탈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 저기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하시는 분이 있군요. 그렇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여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이 다르고, 지식과 지혜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그래서 체화되지 않은, 몸으로 경험하지 않은 지식을 '알음알이'라 하여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여깁니다. 이런 '마른 지혜 건乾慧'는 자칫 수행자의 자만을 부풀리게 하는 심각한 해독을 끼칠 수도 있으니, 깊이 유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P181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 기원전 2세기 합리적 사고를 향한 불교의 설득

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法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P212

잠깐 정리하고 넘어 갈까요.

1)      불교의 첫걸음은 우리가 아는 사물의 세계가 주관적 욕망과 환상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 입니다. 주관적 욕망에 물든 환상의 세계를 상이라고 합니다.  그 칙칙한 점착을 벗어난 객관의 세계를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상의 세계에 집단적 무의식적으로 최면되어 있어서 객관적 법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잘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어렵습니다

2)      불교의 지혜智慧, 혹은 반야般若는 이 두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뜻 합니다.  그 통찰력이 고통과 갈등의 이편 - 此岸세상을 벗어나게 하고, 우리를 저편 - 피안彼岸의 행복과 평화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실상 實相에 대한 이해를 더 깊고 철저히 해나가야 합니다.

3)      오온五蘊은 바로 그 객관적 세계의 구소요소諸法 입니다.  오온을 통해 자아이름에 물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는 폭로되고, 모든 문장과 어법은 를 제거한 형태로, 남의 일처럼 순수 객관적 요소로 분석되던 것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무아無我, 나를 떠남으로써, 나는 비로소 해방됩니다.  그러고 나서 바라보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연기법과 화엄의 세계, 즉 사물과 각 요소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緣起, 그리하여 총체적으로 하나인 세계華嚴의 장엄한 모습입니다.

 

P254

술병에 반이나 남은 술

가령 술병에 술이 반밖에 안 남았다술병에 술이 반이나 남았다는 서로 다른 진술입니까.  같은 진술입니까. 아비달마라면, 여기서 밖에이나따위의 강조구는 분명 주관적 개입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그에 비해 술병에 술이 반이 남아 있다는 진술은 객관적 법이라고 생각할 것 입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수 등이 주도한 대승의 중관中觀술이 있다라는 진술 자체가 이미, 술에 대한 발성자의 관심을 포함하고 있고, 그 사태를 향한 모종의 태도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려 합니다.  관심이 없었다면 술이라는 대상은 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구나 거기 얼마쯤 담겨 있는지가 눈에 들어오지는 더더구나 않았을 것이며, 당연히 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담배를 정말로 끊은 사람은 스스로 나는 담배를 끊었다고 자랑하고 다니지 않는 법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유무 有無, 이른바 객관적 사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렇게 자아의 관심에 의해 의미화된 것으로서의 존재와 관련된 말임을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유무 有無를 말할 때, 그것은 법이 아니라 상에 관련된 말이라는 것을!!!!!!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4/01 - 책은 도끼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016/03/12 - 돼지가 있는 교실


2012/03/20 - 관무량수경이야기





반응형

'책으로 배워가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통령의 글쓰기  (2) 2016.05.13
생각하는 인문학  (2) 2016.05.03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2) 2016.04.17
김대식의 빅퀘스천  (0) 2016.04.12
책은 도끼다  (0) 2016.04.01
어떤 환경에도 대응할 수 있는 '자신의 축'을 만든다  (0) 2016.03.25
하버드의 생각수업  (0) 2016.03.22
지금까지 없던 세상  (0) 2016.03.20
  Comments,     Trackbacks
책은 도끼다
반응형

평소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 '책은 도끼다'!!!!

읽는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 책이다.


그렇다 독자로서 박웅현, 그가 평소 읽었던 책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박웅현은 다독(多讀)보다는 정정독 (精精讀)하는 스타일의 소유자다.

다독이 옳은지 정독이 옳은지를 구분하는 것은 각자 판단의 몫이지만, 나는 정독이 바람직한 독서법이라 생각한다. 한번의 읽음으로 글쓴이의 목적을 알아챌 수 없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 박웅현의 이해력이 놀라웠다.

나라면 수십번을 읽어도 텍스트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캐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한때는 책의 좋은 문장이라든지 핵심내용을 노트에 별도로 기록하거나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지만, 부작용이 있어 그만뒀다. 전체 흐름을 놓치기 일쑤였고 재독 삼독할려치면 기존에 메모했거나 밑줄친 부분이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삭뚝 잘라버리는 부작용 때문이였다.


인간 박웅현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정정독의 참 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온 몸이 촉수인 사람이 되고자한 박웅현의 목표를 그대로 닮고 싶어진다. 이 부분이 이 책의 첫번째 방점이다.

또 다른 책의 입구를 소개해 준 책이라는 부분에 이 책의 두번째 방점을 찍는다.

여기에 글을 적으시면 되요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3/25 - 어떤 환경에도 대응할 수 있는 '자신의 축'을 만든다


2016/03/22 - 하버드의 생각수업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016/03/12 - 돼지가 있는 교실


2008/01/30 - 적은 내 안에 있다




이후 연관글 보기  

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하버드의 생각수업
반응형

일본의 수재였던 저자 '후쿠하라 마사히로'가 INSEAD(유럽 경영 대학원)에 유학하면서 동양(특히 일본과 한국)의 교육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곳 INSEAD에 유학 온 학생들은 사고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능력은 단순 주입암기식 학습법에 익숙했던 동양학생들과는 심한 격차를 보인다. 


과연 '생각할 수 있는 힘'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방법을 읽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을 펴 낸 것이다[각주:1].


저자 후쿠하라 마사히로  |  역자 김정환  |  엔트리  |  2014.03.10


암기하다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중학생을 아들로 둔 대한민국의 아빠로서 나 역시 과거 '후쿠하라 마사히로'처럼 무작정 외우는 학습법을 아들에게 강요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수업내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아들(암기하기 싫어하는) 나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암기하다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라고!!!!!!

정작 조언이라고 던진 이 말이 맞는지 틀린지 모른체 '그냥 해 봐!'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암기하다 보면~~~"된다는 말 속에는 '노력하다 보면 이해된다'라는 속깊은 뜻이 있었다고 자위할 뿐이였다.



암튼 저자는 몇가지의 물음(생각거리)을 독자에게 던진다.

물음을 던진 후 그 풀이과정을 서서히 알려준다. 물음에 대한 찬반 이론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답이다'라고 단정하지도 않는다.

어찌보면 '옳다라고 할 만한 답'이 존재할 수 없는 물음이였는지 모른다.

다만 저자는 '열린 답'을 독자 스스로 찾아갈 것을 권한다. 

'열린 답'이란 각자의 사고, 학습과 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답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답'이 되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답'될 수 없는 것이다.


논리력과 포용력 = 제3의 관점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열린 답'을 찾아내는 굳건한 논리력!

' 다른 답'을 제시하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포용력!

을 바탕으로 하여 '제3의 관점을 발견하고 이노베이션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강한 바람'이라는 것이다.



* 이 책 덕분에 따분한 존재들이였던 철학자 혹은 경제학자 등등이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온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 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 애덤 스미스, 소크라테스, 하이데그.......


*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 근래에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은 책이다.


이전 관련글 보기  

2016/03/20 - 지금까지 없던 세상


2016/03/12 -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016/03/08 -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2016/03/12 - 돼지가 있는 교실


2016/01/17 - 15년 후 당신의 자녀가 만날 직업


2013/03/06 - 남한산성 - 김훈 장편소설


2013/02/24 - 칼의 노래


2010/03/17 - 소리없이 강한 책 - 전략 프로페셔널


2009/07/13 - 협상의 10계명






  1. 2016년 3월 25일 덧붙힘 [본문으로]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최근 작성 글
최근 작성 댓글
최근 작성 트랙백
프로필
공지사항
글 보관함
캘린더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TODAY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