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mb정부는 이번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그리고 그 결정이 얼마나 위험한 사태를 초래할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대다수 국민이 주장하는 '재협상'이 국제적 관행(?)과 국가 신뢰도 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재협상할 수 없다고 했던 2mb정부. 알고 보니 재협상할 의지 조차 없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협상 실패자가 취하는 일반적인 후속 전략 일반적으로 '협상에 실패한 당사자(2mb정부 : 협상의 결과를 원점으로 되돌려는 의지가 강한????)'는 협상 상대방(미국)이 다른 제3자(대만,중국,일본,...)와의 협상에서 실패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결과를 예의주시한다. 그러면서 협상 상대방(미국)과 제3자(대만,일본,중국,.)의 협상 내용이 제3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되었을 때, '협상에 실패한 당사자'는 협상 상대방(미국)에게 불평등한 협상을 무효화를 주장할 수 있고 협상의 내용을 실패한 당사자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변경하는 상식적인 전략이다.
그런데 2mb정부는 미국측에 우리와 같은 조건으로 다른 국가들과의 쇠고기 협상을 서두러 줄 것으로 요청했다고 하니, 정말 부끄럽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나오는 2mb를 보고 '또라이 xx네'라고 할 것만 같다. 도대체 2mb는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한 그들의 관점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궁금하다.
국민 앞에서는 '송구하다'는 식의 사과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국민 등뒤에서는 촛불집회 참여자를 구속하고 밖으로는 망신살 펼치는 우리의 2mb정부.
그들의 사고와 뇌는 정화 불가능한 독소로 가득 집단인가 보다.
"정부, 美에 타국과 `쇠고기 협상' 재촉"
김우남 "비난여론 돌리려 비상식적 외교"
(서울=연합뉴스) 송수경 기자 = 이명박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협상 뒤 국내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측에 우리와 같은 조건으로 다른 국가들과의 쇠고기 협상 체결을 서둘러 줄 것을 요청했다는 주장이 30일 제기됐다.
국회 쇠고기 국정조사 특위 소속 민주당 김우남 의원이 이날 공개한 외교통상부 대외비 자료에 따르면 외교부는 지난 5월초 주미 한국대사관에 `미국의 쇠고기 협상계획'이라는 문서를 발송했다.
이 문서에는 "국제수역사무국(OIE) 기준 등에 기초한 협상 체결에 대한 강한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미국산 쇠고기의 주요 수입국인 일본, 대만, 중국도 우리와 같은 기준을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외교부는 이 문서에서 "미국과 타국의 쇠고기 협상 추진계획을 파악하고, 미국이 가능한 한 이들 국가와 조속한 시일 내에 협상을 추진하도록 요청하라"고 주미 한국대사관측에 지시했다.
이에 주미 한국대사관측은 5월5일 웬디 커틀러 USTR(미 무역대표부) 대표와 접촉, 이 같은 요청을 했다고 김 의원은 전했다.
김 의원은 "주미 한국대사관은 미국측이 `대만은 OIE 기준의 완전 수용 쪽으로 협상이 막바지에 와있고, 일본도 한국과 같은 조건의 협상을 촉구할 계획이며 중국과는 소극적 입장으로 인해 구체적 협상 계획이 없다'고 설명했다는 내용을 본부에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미국측 설명과 달리 각국 대사관이 외교통상부에 보고한 협상 추진 동향보고를 종합해보면 미국과 일본, 대만과의 협상은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며 "정부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비상식적 외교를 펼쳤다"고 비판했다.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문학으로 표현해 낸 이병주 역사 장편소설 『지리산』제1권 "잃어버린 계절"편. 혼란했던 우리 현대사를 살아 온 하준규라는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중앙대학 법학부 졸업반인 주인공 하준규가 학도병 지원제 실시를 맞이해 겪었던 고민이나 학병을 거부하고 덕유산에 은신하기까지의 과정, 덕유산을 거쳐 괘관산(지리산)으로 가 보광당을 조직하여 해방을 맞이하는 과정
삼십년을 살아오면서, 책 속에 나온 인물과 핏줄을 나눈 후손을 처음 만났다.
주인공의 후손을 찾아 일부러 나선 것도 아니다.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진 만남 속에서....
흔히 빅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만남의 특성 상 미팅의 초반에는 만남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워밍업을 시작한다. 예를 들면, 고향이 어딘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고향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는 그 사람이 그 분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황홀감을 느꼈다.
대학생 시절 조정래[태백산맥]과 더불어 재미있게 보았던 이병주[지리산]이다.
이 포스터에서는 사상 혹은 이념을 주제로 삼지 않고자 한다.
[태백산맥]은 지방사투리가 어울어지는 감칠맛이 났다면, [지리산]은 인물의 매력(해박한 지식,뛰어난 무술)에 뿍 빠져 읽었다.
하준수(남도부) 남도부(南道富, 1921년 ~ 1955년)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을 지냈다. 본명은 하준수(河準洙)이다.
생애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출생했다. 남도부의 집안은 함안의 부호로 당시 그의 아버지 하종택은 오랫동안 면장을 지냈으며, 천석꾼이었다.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중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주오 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중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이에 남도부는 징집을 거부하고 병역기피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다. 1945년 3월, 지리산 근처 괘관산에서 동지 70여명을 모아 조직한 결사 단체인 보광당은 무장을 갖춘 체제를 이루어후에 공산주의 파르티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남도부는 당수와 구보에 능한 무술 고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건군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새생활운동’을 펼치며 건국에 대비했으나, 1946년 1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다. 당시 이념적 지향은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았고, 인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을 만들었을 때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온건했다.
그러나, 당시 친일 전력이 있는 경찰에 쫓겨 지리산에 숨어들게 되자,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 까닭을 미군정의 정책 때문이라 생각하여 미군정 지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도부라는 가명은 이때 받은 작전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1949년에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었을 때 제3병단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사령관인 김달삼과 함께 태백산 일대의 유격대를 지휘했다.
한국 전쟁 중에도 태백산과 일월산 등을 무대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휴전 후인 1954년에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된 뒤 1955년 여름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되는 순간에도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가 남도부를 모델로 삼은 인물이라 이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유명해졌다. "전설적인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라는 문구와 함께 《남도부》라는 제목의 실화소설도 나와 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보다 더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하준수(1921~1955)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게바라(1928~1967)보다 더 일찍 태어나, 더 일찍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는 미 군정 시절 유격대의 작전명 남도부(南道富)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함양군의 천석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주중학교(현 진주고)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해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졸업반 시절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숨어든 그는 지리산에서 동지 70여 명을 규합, 보광당이라는 항일 무장게릴라 부대를 창설합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파르티잔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왼쪽)와 하준수. 게바라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하준수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는 해방 후 몽양 여운형과 함께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군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 군정에 의해 좌절당하자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미 군정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지휘합니다. 이 때의 작전명이 남도부였고, 그 때부터 그는 하준수라는 본명보다 남도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으나 1953년 휴전 후에도 남한에 남아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돼 1955년 김창룡 특무대장의 심문을 받고 총살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네 살이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안락한 삶을 거부한 채 해방 이전엔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맞섰고, 해방 후엔 미 군정에 게릴라전으로 맞섰으며, 단독정부 수립 후엔 이승만 정권에 인민군 중장과 파르티잔 지휘관으로 맞서다 간 그의 짧은 삶은 어쩌면 체 게바라보다 훨씬 치열했습니다.
하준수의 생가를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우리나라가 이념 대립만 없는 사회라면 게바라보다 더 유명한 혁명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게바라를 아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 중에도 하준수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입니다. 지금도 그의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의 하준수 생가.
도천마을 역시 한국전쟁 때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곳입니다. 하지만, 좌-우 어느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든 관계없이 그의 고향마을에서 하준수를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부잣집 아들 출신 좌익이긴 했지만, 해방 후에는 곳간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줬을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해꼬지를 하지 않은 따뜻하고 높은 인품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축지법을 쓰는 전설적인 무술의 고수로 기억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도 신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어머니 집 쪽에서 본 하준수 생가.
그의 생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폐가로 방치되고 있죠.
이미 지붕의 한쪽 귀퉁이는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하준수의 집은 한 채가 아니라 대여섯~일곱 여덟 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살고 있는 인근의 집도 원래는 하준수 작은어머니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왼쪽 지붕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들 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문화재적 가치도 높습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좌익 게릴라 총사령관의 집이어서인지 행정관청에서도 전혀 보존에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좌와 우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던 그의 집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아마도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요?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의 집을 보면, 점점 묻혀져 가는 현대사의 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1784년 벤자민 프랭클린은 파리에서 미국 대사로 근무를 했다. 당시 상인들과 시민들에게는 저녁시간에 불을 밝히는 양초 값으로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보다는 겨울이 문제였다. 겨울에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초저녁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했다. 때문에 양초의 값으로 상인들과 시민들은 너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문제를 공무원들은 해결해야 했다.
공무원들은 먼저 양초의 유통을 투명하게 해서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중간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철저하게 단속해야 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양초를 만드는 기술을 향상시켜서 더욱 더 싼값의 양초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기존의 것보다 더 밝고 더 오래 가는 효율이 높은 양초를 개발해야 했다. 또는 양초를 대신할 수 있는 값이 저렴한 새로운 대체재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했다.
당시 파리의 공무원들에게는 서민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이 양초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었다. 미국 대사 프랭클린은 다른 공무원들과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고 문제를 독창적이고 획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제안을 하게 된다.
“1년에 두 번 온 나라가 시계를 다시 맞추면 가게의 영업시간을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맞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가게 주인도 양초를 훨씬 적게 쓸 수 있고 시민들도 양초 값을 아낄 수 있지 않을까?”
프랭클린 이전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을 바꾸는 개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시간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기본 가정을 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제안은 전 세계를 통해 굉장한 양의 에너지를 절약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된 써머타임 제도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하겠지만, 요즘 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작정을 하고 영화를 본 것은 아니다. 내가 친한 회사에서 극장을 빌리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신년 인사를 한다며 초대장을 보내서 그냥 얼떨결에 영화를 보게 된 거 같다.
오랜 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자주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영화는 나와 다른 환경과 생각을 가진 주인공들의 삶과 생각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어서 나에게 문화와 생각의 다양성을 제공해주는 매우 좋은 매개가 된다.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 나로서는 영화관의 큰 사운드가 내 심장 박동을 자극하고 혈액 순환을 가속시키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느끼며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경험한다는 것이 영화를 보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거 같다.
나는 극장에서 나오면서 앞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양초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항상 문제를 안고 사는 우리는 우리의 문제도 저렇게 획기적인 방법으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문제를 바라보는 편협하거나 또는 일방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찾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에게 닥친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말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아서 항상 안타까워한다.
일반적으로 관점을 전화하고 다양한 시각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와 다양한 경험이다. 매번 같은 사람들과 만나고 같은 이야기만 한다면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 새로운 생각은 서로 다른 생각들의 조합으로 많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양성이 약간만 증가해도 그 조합으로 새로운 생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게 되는 거다.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다양성을 증가시켜보자.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마음의 여유다. 아주 바쁜 기업인이나 정치인들도 영화나 오페라를 정기적으로 많이 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없다는 말이 어쩌면 자신의 무능함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다양성을 증가시켜보자. 그것이 새로운 것을 얻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오랜 만에 영화를 보니까 영화 참 좋은 거 같다. 자주 영화를 봐야겠다.
'무대뽀'의 어원은 일본어 無鐵砲입니다.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鐵砲는 일본말로 (소)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無鐵砲란 흔히 하는 말로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총도 안 가지고 간다"와 비슷한 뜻이지요. 이 일본식 한자어의 발음(むてっぽう)을 외국어(아직은 우리말인 외래어가 아니라 외국어인 줄로 압니다) 표기법에 맞추어 쓰면 아마 '무뎃포'가 될 겁니다. 쇠鐵자의 일본어 발음이 'てつ'(데츠)인데 뒷글자와 연음이 되어서 'てっ'(뎃)으로 바뀐 거지요.
독도를 자기 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말이 "무대뽀'일 것이다. 위의 설명 내용-'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인 총도 안 가지고 간다'라는 부분을 읽은 후에는, 일본이 독도를 얻기 위해서 현재까지 그들이 실천해온 전략이 아주 치밀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에 사실 섬뜻함을 느꼈다.
독도를 가지기 위한 일본놈들의 전략은 "무대뽀 정신" + "전 세계를 향한 다방면의 로비 전략" +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한 한국인을 지치게 만드는 심리적인 방법도 포함된 것 이다.
'한국인은 냄비 근성이 있어서(이 표현도 일본놈들이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달리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 이용했다) ', 금방 달아 올랐다가 이내 식어버린다는 것을 일본놈들은 잘 알고 있다.
기분 나쁘지만 냉정하게 되씹어 본다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불과 몇 주전만해도 대한민국의 화두는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였다. 그런데 지금은 촛불이 다 꺼져버린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해야 할 것이다.(이명박 정부가 그렇게도 강경하게 대응했던 이유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국민들이 무관심할 것이다'라는 예상에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 단박에 독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거둬야 한다."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결코 일시적이어서 안 된다. 일본보다 먼저 지쳐서는 안 된다. 단박에 독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거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본이 생각한 데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