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 위쪽에는 생가가 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별로 볼게 없지만, 옛 사람의 향기를 맡기에는 좋았습니다. 특히 여러 문학가와 주고 받은 몇 통의 편지들이 눈길을 잡았습니다.
세번째로 들린 곳은 바로 동피랑 마을 입니다. 알고보니 동피랑 마을은 몽마르뜨와 같은 분위기라고 한다네요. 동피랑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만 듣는이로 하여금 친숙함을 불러오게 합니다.
이곳은 비탈진 곳에 허물어져 가는 주택단지 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유명하게 된 것은, 골목골목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졌기 때문 입니다. 부수고 새로 짓는 삽질형 개발논리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간단한 아이디어 접목 하나로 유명한 관광지가 된 곳 입니다.
다만 집들이 워낙에 촘촘하게 들어앉아 있고 도로가 좁다보니 관광객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주민에게 소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단속을 해야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런 곳에 어떻게 살아....", "정말 낡아 빠졌다."등의 헛소리가 무심결에 나올 수 있으니 말 입니다. 이런 말들이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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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통영에도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좋은 풍경을 손쉽게?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 동피랑 마을 꼭대기에서 충분히 통영 앞 바다와 시내의 풍경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만일 한려해상수도의 멋진 경치를 편하게 감상할 분은 '케이블카'가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다음 코스로 찾아 간 곳은 바로 충렬사 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 입니다. 네비게이션이 위치를 잘못 안내해 준 덕분에 웃지 못할 상황도 잠깐 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유물 전시관을 먼저 보았는데, 정말 초라했습니다. 안내판을 보지 못했다면 화장실인 줄 알았습니다. 오래 전에 만들었는지 건물디자인이 역사명승지에 옆에 있는 화장실과 흡사했습니다.
그러나 실망을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사당쪽을 다가 갈 수록 오랜 역사의 향기가 전해 졌습니다. 그리고 아름더리 은행나무의 노랑잎이 늦가을 햇살을 받아서 선명한 느낌을 전해 주었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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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의 마지막 코스는 해저터널 이었습니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 진 것이라 합니다. 당시의 토목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의외로 단순한 방법으로 접근했더군요. 바로 바닷물을 막아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통영 '해저터널'의 색다른 점은 바로 생활 속에 묻어 존재한다는 것 입니다. 일반적인 관광지는 현지인의 발걸음보다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많은 곳 입니다. '해저터널'은 바로 바다 건너 저편 마을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지름길 역할을 하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교복차림의 학생들, 운동복차림의 아주머니들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관광객들은 허전한 맛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상상을 못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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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 출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면서 설명해 주면 쉽게 이해를 하였습니다.
해저터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
통영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묘미는 '일본풍'을 조금 느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아래 사진은 해저터널 출발 포인트 앞에 있는 어느 주택 입니다. 대충 보아도 우리나라의 가옥구조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일본식으로 지은 주택 입니다.
해저터널 입구에서 찾은 일본풍 주택
중앙듸젤 !
'디젤'이 아니라 '듸젤' 입니다. 마치 70~80년대 사용했던 표기법 입니다.
바로 통영에서는 느낄 수 있는 맛은 과거 기억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청마문학관 주차장에서 찾은 '중앙듸젤'간판
이렇게 첫 째날 코스를 마치고 숙소로 예약해 놓은 팬션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다른 손님들은 없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팬션위치는 통영과 거제도 다리가 있는 곳으로 건너편 거제도의 야경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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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션 여행의 백미는 데크에서 구워 먹는 바베큐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여행에 준비한 고기는 목살과 삼겹살이었습니다. 장모님께서 하시는 고기집 '불타는 껍데기'에서님들에게 제공하는 고기 그대로를 가져왔습니다.
팬션 여주인이 바베큐를 맛있게 굽는 방법을 설명하시면서
"정말 좋은 고기를 가지고 오셨네요. 이렇게 두꺼워야 맛있게 구워 집니다"라며 시범으로 구워 주셨습니다. 고기 살점 하나를 입안에 넣으니 육즙이 입안에 가득 펴지면서 부드럽고 맛 있습니다.
얼마전에 가족들과 함께 경주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호텔 예약을 위해서 7월말부터 여러 사이트를 들락날락 하면서 저렴한 숙박장소를 찾아 보았습니다.
며칠 간의 자료 조사 결과, 옥션 숙박 을 통하여 예약을 하였습니다.
경주여행 출발 전날, 할인마트에 가서 여행 준비물 이것저것을 구입하고 있을 무렵에 난데없이 걸려온 전화 한통! 발신번호를 보니 서울이었습니다. 요즘 스펨성 전화가 자주와서 받을까 말까 말성이다가 통화를 버튼을 누르니
"안녕하세요. 여기는 링크프라이스 입니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진행한 옥션 숙박 을 이용하신 회원들 중에서 무료 1박 제공 이벤트에 회원님께서 당첨 되셨습
니다"라면서 이름 및 주소확인을 하였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떠난 경주여행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여행 일정을 먹고 마시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최대한 교육효과를 줄 수 있도록 설계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경주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등기우편을 경비실에 맡겨 두었으니 찾아가라는 우체부 아저씨의 메로를 발견했습니다. 경비실에서 찾아온 등기우편은 다름아닌 '무료 1박 제공 숙박권'이었습니다.
'설악아이파크콘도미니엄'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숙박권이네요.
주중에만 이용가능하지만 최대 7명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하니, 이번 가을 즈음에 장모님과 함께 여행할 작정입니다. 가을 즈음이면 처남의 새차(YF소나타에서 소렌토R로 바꿈)가 나오니 안성맞춤일 것 같습니다.하하
옥션 숙박 을 이용하면 좋은 점
- 가끔 무료 숙박권을 받을 수 있다능.....
- 옥션 숙박 스템프 10개를 모우면 7만원 상당의 숙박권을 준다능.....
표충사(表忠寺)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四溟) 대사(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원효대사가 창건했던 죽림사(竹林寺)였다고 한다.
829년인 신라 흥덕왕 4년에 중창하면서 영정사(靈井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839년에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사명 대사를 모시는 사당인 표충 사당을 이 곳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꾸었다. 현재 경내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大光殿)과 제52호인 표충 서원(書院) 등의 건물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과 보물 제467호인 3층 석탑이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 대사의 금란(錦란) 가사(袈裟)와 장삼(長衫) 등 유품 약 200여 점이 유물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향완이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준다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도구로서 향로라고도 부른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아가리 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양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6개의 원 안에 ‘범(梵)’자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梵)’자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글자가 있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자료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받침 안쪽에 새겨진 글을 보면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요즘 경제위기로 소비자의 지갑이 꽁꽁 얼어 붙었다고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장모님의 뛰어난 음식 솜씨를 알고 있는지라 식당을 하면 꽤 많은 수익을 얻을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옆가게는 빈자리였지만 유독히 장모님의 가게는 자리가 부족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손님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만큼 일손이 부족한 경우도 허다 합니다.
저의 아내가 일주일에 2~3번 정도 가서 식당을 일을 돕기도 합니다. 당연히 아들의 식사 문제와 교육문제를 제가 가끔 맡아서 해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온 가족이 손님을 기다리는 장모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불편과 수고로움을 견디고 있나 봅니다.
반면에 그 동안 애지중지하면 보살펴 온 외손자와 함께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라 연일 내내 불안한 기색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항상 다 퍼주고도 부족함을 지울 수 없는 심정이라고 할까요. 저의 장모님은 솔직히 돈 욕심이 없는 듯 합니다. 겉으로는 돈 욕심에 이리 힘든 가게를 운영한다고 하시지만 손님에게 내 놓으시는 음식의 재료를 보면 이렇게 해서 얼마 남을까 하는 우려도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맛을 인정해주는 손님의 표정에 즐거워 하고 그 행복한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십니다.
다만 오로지 당신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유일하게 안스러운 존재는 아마 외손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 같으면 모든 일상 속에서 외손자를 뒷바라지를 했었지만 이제는 자연히 외손자에게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외할머니로서의 미안함이 늘 당신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으셨나 봅니다. 외손자에게 외제차를 선물을 해 주었답니다. 얼마나 갖고 싶었을까요. 사람들의 부러워 하는 눈길....... 상상만 해도 두근 두근 !!!.
요즘은 아내가 봄바람??이 난 모양이다. 그래서 요즈음 내가 아들 돌보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오늘 하루 종일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야외로 나가서 바람을 쐬고 집에 와서 식사를 해결하곤 한다.
지지난 주 일요일에는 내가 손수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소면 삶는 것부터 해서 육수 만들기를 도전했다. 그리고 양념장도 대충 얼렁뚱땅 준비해서 나눠 먹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과거 대학 시절에 한 번 시도 해서 후배들에게 먹여 줬는데 백점 만점에 백점을 얻기도 했다. 이런 성공체험을 바탕으로 아내와 연애시절에 수제비를 손수 만들어서 먹었는데, 완전 니맛 내맛도 없는 수제비를 끝으로 거의 10년 정도를 수제비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주에는 마음 단단히 먹고 도전한 끝에 아내로부터 예상외로 맛있다는 평을 받았다.
아빠! 치킨 버그가 없어!
오늘 일요일은 아내가 하루 종일 집을 비웠다. 그리나 아내가 엄청나게? 다양한 반찬을 준비하고 터라 특별히 내가 새롭게 아들을 위해서 음식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감기때문에 도통 입맛이 없는 듯 했다. 그럭저럭 아침, 점심 식사는 근근히 먹였는데 저녁이 되니 뭘 먹을지가 큰 고민이 되었다. 평소에 아들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 먹기로 합의를 보고 가까이 L마트 내에 있는 L~리아에 가서 사오기로 했다. 어린이 불고기 버그 세트를 사면 공룡 장난감을 준다기에 (이런 기회를 내버려 두지 않는 아들의 성격을 고려해서) 일찌감치 내가 먹을 치킨버그와 같이 주문해서 포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나의 대기번호 스틱에 알람불이 켜지고 카운트에 가서 포장물을 대충 확인하고 집에 들어 와서 햄버거를 펼쳤다. 그런데 치킨버그는 어디로 간거야.......
그랬다. 어린이 불고기 버그 세트만 포장되었고 치킨 버그는 없었다. 계산서에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서 설명하니 직접 집으로 배달해 주겠다고 한다. 10여분을 기다리니 치킨 버그와 감자칩(서비스 제공)이 도착되었다. 점장님인지 몰라도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하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한 마음이 생길려고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