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처음으로 접한 한형조 교수님의 작품을 일년여만에 다시 만났다.
이분의 문체는 다소 구어체에 가깝다. 어렵게 느껴지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 하듯 풀어내고 있으니 부담감이 덜해진다. 이번에 읽은 한형조 교수님의 책은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을 가졌다. 내가 읽은 이분의 책 제목들을 살펴보면 좀 독특하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허접한 꽃들의 축제.......
도대체 '허접한 꽃'은 무엇을 의미할까....?
허접한 꽃들의 축제
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2011.03.10
이 책은 금강경이라는 불교경전에 대한 해설내용이다.
한자로 구성된 경전을 읽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령 한자를 잘 알더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도 불가능하다. 금강경 원문과 해석이 곁들여 설명한 책들이 존재하게 된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 역시 이 종류의 책에 속한다.
불교 가르침의 고농축 울트라 액기스가 반야심경이라면,
금강경은 중생들의 이해력(근기)의 차이를 고려해서 그 근기에 맞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는 불성[부처(쉽게 말해 '행복한 사람')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 속에 묻혀 있는 바로 그 불성을 찾아내면 누구나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는 그 경지에 쉽게 오르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실패를 거듭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등산로 초입에도 들어지 않은 이도 있다. 왜 이런 것일까.....바로 '업'이라는 장애때문이다. 업은 바로 습관의 축척이다.
자신의 삶 동안 자신의 경험에 의하기도 하고, 부모님의 영향에 의하기도 하고, 또는 친구, 선생님 혹은 이웃에 의해 간접적이 영향들이 얽히고 섥혀 형성된 그것이 바로 '업'이다.
이 놈의 '업' 때문에 우리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서서히 쇠퇴해져 버리게 된다.
원효대사가 부처님을 찾아 헤매던 과정에서 생리대를 빤 물을 건넨 어느 여자가 부처인 줄 모르고 호통치고 떠나 버렸는데, 그 여자가 바로 부처였던 것이다. 생리대를 빤 물은 더럽다라는 허상이 에 휩쌓였던 원효!의 마음은 '업'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부처의 모습은 불당에 잘 모셔진 잘 생긴(?) 얼굴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러운 거지로 발현할 수도, 성질 고약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눈에 보여지는 것들에 집착한 나머지 진실을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눈에 보이는 누군가가 부처일 수 있으니 예의를 다해 모셔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 살아간다면 일생이 너무 힘들 것이다. '그 분이 부처일 수 있으니...'가 아니라 '그 분이 부처이다!'라는 마음, 모두가 부처다라는 마음을 가져야만 일생이 행복할 것이다.
'업'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책에서 나온 것처럼 절간에 있을 때는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파악하다가 절 문밖을 나서면 이내 탐욕으로 무장한 중생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이런 반복 패턴에도 불구하고 '핵'을 놓치지 않아야 겠다는 굳은 심지가 필요한 듯 하다.
내가 생각하는 '핵'이란 것들은.......
- 눈에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기
- '마음'의 움직임을 순간 순간 알아차리기
불교라는게 참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는 생각을 매번 해 본다.
'모든 이가 불성을 가졌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불교가 참으로 위력적이다는 느낌이 든다.
나 같은 사람도 부처가 된다........
나 같이 허접한 꽃의 축제란....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리라.....
모든 이가 부처가 되는 것이 바로 '허접한 꽃들의 축제'가 아닐까 싶다.
*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이 다른 말로는 '잡화경'이라고 한다.
잡 (雜 - 섞일 잡 : 섞이다. 어수선하다. 천하다)
[ 주요 발췌문 ]
P19
전통이 축적해온 수많은 주석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단 하나를 골랐는데, 선의 실질적인 창시자 6조 혜능의 [금강결 구결口訣]이 그것이다.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아름다운 육조의 구결에 비하면, 내 주절거림은 해 솟은 다음의 횃불이고, 큰 물 진 다음의 논에 물대기에 불과할 것이다.
조선조 건립 초기 함허 득통이라는 스님이 이 합본의 틀린 글자를 바로잡고 자신의 해설을 덧붙여 간행했는데, 이것이 지금 [금강경]의 유통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금강경오가해]입니다.
P35
나는 외국어 음을 본토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능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효율적이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관건은 소통이지 재현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Pizza를 ‘핏짜’라고 핏대(?) 올려 발음하는 사람이 있으나, 표기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대중화되고, 발음이 익숙해지면 그때 그것은 자연스레 표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P43
붓다 당시의 인도는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가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아니하기를 권했지만, 그러나 탁발의 경우, 가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육식보다 더한 금기가 ‘음식을 가리는 것’이었다. 분별이야말로 정신적 자유와 평화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P44
도가 뭐냐고 묻자, 조주는 “차 한 잔 들라”고 했고, 밥을 먹었다는 제자에게는 “그럼, 가서 그릇을 씻어야지”라고 했다. 여기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다. 어떤 숨겨진 뜻이나 신비적인 통찰을 담고 있지 않다.
일상日常이 곧 성사聖事이다.
우리가 붓다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붓다처럼 우리도 집에서 직장으로 출근하고, 학교로 나서며,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고 저녁 가족과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때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무엇이 다른가. 겉으로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다르다면, 안의 풍경이 좀 다르다. 붓다의 마음은 이를테면 ‘비어 있다空’.
P100
불교는 그 ‘깨달음’을 그러나 독점하지 않는다. 그게 위대한 점이다.
P112
경허 스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자자, 아차, 싶어 잽싸게 처마 밑으로 피했것다. 봉창을 열어 농부 하나가 핀잔을 주었다. “거 도를 닦으신 스님네가 채신머리없이 비 정도에 이리들고 저리 뛴단 말이오.” 옷의 비를 털어내며 하늘을 보던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를 피하는 것과 도道가 무신 상관이오.”
P114
다만 자성自性을 믿고, 그 힘에 의지<護念>하라
이 뿌연 마음들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혜능은 여기 함부로 손을 대거나 돌로 누르려는 마음을 경계한다. 다만 자성의 힘을 믿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라고만 권한다. 혜능의 돈교는 그 믿음이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해 줄 것이라고 설파한다.
호념 護念과 부촉付囑에 대한 혜능의 생각은 독창적이다. 그는 “여래가 밖에 서서 보살들을 축복하거나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여래가 자선호념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자기 내부의 불성의 자각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를 정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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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여래는 “내 마음의 여래”를 가리킨다. “내 마음이 곧 여래”라는 말은 선 禪의 표어가 된 “네가 부처다”라거나, “마음이 곧 부처이다”처럼 돈교의 취지를 단도직입 보여주는 표준구이다.
“내가 곧 여래”라면 마음의 훈련은 다만, 그 여래를 숨막히게 하는 잡동사니와 장애물을 걷어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혜능은 “다만 증애 憎愛를 일으키지 말고, 육진 六塵에 물들지 말라”권한다.
역시 사랑과 미움이 문제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모든 문제의 진원은 사실은 마음속에 있다. 같은 잘못이라도 마음에 맞거나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은 눈감아주고, 같은 공적이라도 뜻을 달리하거나, 당파나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은 무시하거나, 깎아내리기 바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나 태도가 공적이고 객관적임을 웅변하고 설득하고 강요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문제가 바깥에 있기보다, 안에 있다는 불교의 판단이 옳지 않은가.
P130
엉뚱한 사설 하나.
보살이라는 이름은 이제 흔해졌다. 절간에서 공양을 담당하거나 다른 수고로 봉사하는 사람들, 또는 그 절을 찾는 신도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 ‘드문’이름이었다. 그것은 본시 대승의 최고 인력형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처럼 개념의 세속화, 혹은 인플레는 흔하게 발견된다. 가령 유교에서 ‘양반’은 지난 시절 고위관료계급을 가리켰으나, 지금은 삿대질에 멱살 드잡이할 때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
P138
앞은 ‘반성’의 길이고, 뒤는 ‘믿음’의 길이다.
1) 반성의 길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혹시 내가 나의 습관과 편견에 젖어, 혹은 내 이해에 너무 절박해서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내게 하는 섭섭함이나, 작은 부당한 대우 정도는 스쳐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백한 악의로 나를 해친다든지, 공공의 이익을 훼손하는 사람은 응분의 벌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평화이다. 평화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 ‘믿음’의 길에서 나는 내 속의 힘과 빛에 유의한다. 안팎의 소음을 차단하는 만큼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얼굴과 대면하기 시작한다. 방안은 더욱 고요하고 대문 밖의 산책길에서 ‘사물’은 더 선명히 드러난다. 보이지 않던 꽃들이 보이고, 변화하는 날씨에 풍경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이면 숙련이 상당히 진척된 것이다. 이 훈련의 관건은 ‘타자’와 ‘유용성’의 자동 메커니즘을 에포케, 의식적으로 괄호치는 데 있다.
3) 두 연습이 협력하면 ‘사물이 다른 모습 하에서’ 드러난다. 이를 유식唯識의 依他起性이라 부른다. 이 시각의 전환에서 그전까지 변계소집이라. 오직 사물을 내 욕구와 관심하에서 이용해온 죄와 업을 반성하게 된다.
가령, 내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사는 신세를 생각한다. 나는 물과 불, 공기와 자연에게, 그리고 농부와 상인, 가족과 이웃의 신세를 지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만큼 얼마나 빚을 갚고, 나머지를 베풀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만일, 여기서 저울이 보답보다 신세 쪽으로 기운다면 그건 죄를 짓는 일이다.
그동안 너무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 내 주머니의 것을 꺼내줄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나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있지 않고, 서로 중중의 인연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세계는 이런 의타기依他起 의 네트워크이고, 화엄의 어법으로 하면 중중무진의 법계의 총상總相이다.
P180
이어서 말한 “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도 같은 뜻을 표명하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되면서 견해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 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속에 살고 있다.
지각된 형체와 소리, 냄새, 접촉 등은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법이 없다. 언제나 마음속에 흔적을 새기고, 찌꺼기를 남긴다.(이것이 업의 단초이다) 흔적과 찌꺼기는 이들 지각에 대한 ‘마음’의 호오好惡, 증애憎愛, 취사 取捨로 나타난다.(이 형성과 강화의 메커니즘을 정식화한 것이 12연기이다.) 이 반응은 생명의 유지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작용이지만, 그러나, 이 활동이 ‘너무 멀리 나감으로써’, 그 무절제와 방만이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형태와 소리는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다치고, 사무의 공정성을 잃기 쉽다. 그 형태와 소리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일 때면 더 없이 위태롭다.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업의 대부분은 ‘사람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기에…..
P184
이 자신 속의 잠재력을 격발시키자면 때로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 삶의 루틴이 급격하게 변화하거나, 남다른 고통을 겪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혹은 직접 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런 전환의 기회가 더 많다. 원효도 “생사를 한번 겪어보아야” 불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무한정 있을 것 같았던 시간이 실은 없다는 것의 자각이 우리가 안전하게 여겼던 삶의 토대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때 그는 거기 새로운 토대를, 토대 아닌 토대를 건설해야 할 실존적 필요에 직면한다. 그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삶이 찰나이고, 대문 밖이 저승임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미 이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껍질을 벗고 남을 향해 의미의 시선을 던지게 된다. 여기가 초발심 初發心이다!
초발심이 선다면, 이미 위대한 깨달음의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다.
P211
원효가 관음을 친견치 못한 이유
몇 마디 덧붙인다.
우리네 범부들은 여래가 사람의 몸을 하고, 특정한 ‘얼굴’을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룩하고’, ‘원만한’ 얼굴을 소상 塑像으로 새겨 불당에 안치해 놓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인간적 표징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보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투영이고, 그것은 다만 내 그림자이지 여래의 본모습은 아닌 것! 만해의 [님의 침묵] 서문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P217
불교설화에….이런 오랜된 이야기가 있다. 숲 속에서 동물들이 우르르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사슴이 달리니 토끼도 달리고, 말이 달리니 호랑이가 달렸다. 코끼리며 공룡까지 달렸나 싶다. 한참을 달리다가 숨을 돌린 다음, 왜 이렇게 달리는지 진원지를 찾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최종적으로 일어서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찾아가 보니, 거기 망고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게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매스컴과 권력이 대신 생각하고, 그것이 행동한다. 우리는? 꼭두각시들이지. 그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우리는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TV속의 광고가 일러주는 대로 우리는 물건을 고르고 가치를 선택하며, 사람과 관계 맺고 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 그토록 획일적이고, 단선적이며, 또 그만큼 빈곤해진 근본 이유이다.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 보이는 이미지, 전하는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의 눈, 기 氣의 교감으로 그것들을 허파虛破, 간파看破해야 한다. 부처님의 ‘바른 눈正眼’이 왜 우리네와 달리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P219
우리가 이 땅에 오시리라고 믿는 그 ‘여래’는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 우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그것은 재산이나 지위, 권력 등 이른바 3P(Property, Prestage, Power)와 다른, 미학적 정신적 가치에 해당한다.
여기 함정이 있다. 물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 더 고귀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한다. 물질의 우상보다 정신의 우상이 더 위태롭고 위험하다. 진리의 이름으로 특정 종교를 독단화하는 사람들, 정의의 이름으로 특정 이념을 기차로 내거는 사람들이 저지른 죄와 피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작게는 ‘마땅히’의 이름으로 가정과 학교에서 저지르는 설교와 강요의 미시적 폭력들을 섬세하게 경계해야 한다.
불교는 진리를 ‘우상’으로 권력화하고, ‘소유’로 소외시킬까 보아서, 여래를 희망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를 보자기에 숨겨버린다. 이 “쓰고 지움sous rature, under erasure”이야말로 [금강경]이 베푸는 위대한 노파심이다.
P235
서두에서 [금강경]이 [반야심경]과는 달리 체계적이기보다 설득적 반복적이라고 한 것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불교가 원래 그렇다. 뗏목이기에, 목적은 일깨우는 것이고, 그렇다면, 근기와 상황을 고려하여, 같은 얘기를 다른 방식, 다른 어법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교설에 대한 이 독특한 인식을 방편方便론이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
P276
책을 덮고 길을 나서라
책을 열어야 길을 확인할 수 있지만, 책을 덮어야 길을 나설 수 있다.
“말이 너무 길고 많으면 재미가 없다…….능금이나 배를 한 개 다 먹어야 맛을 아는 것이 아닌 것 처럼…..”
관건은 역시 삶이고 경험이다. 말을 이해하고, 소식을 접하려면 직접 격외 格外의 실참 實參을 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아차, 나도 지금 너무 많은 말을 주절대고 있는 중이다. 스님은 말한다.
과수원의 과목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데, 칠판 강의를 듣거나, 말과 글로써 배우더라도 자기가 직접 과수원에서 이삼십 년간 과목을 키워보면 선생에게 배운 그 이상의 것을 자기도 모르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돌咄. 과수원이 꼭 산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풍류가 아닌 곳에 진짜 풍류가 있다는 것처럼 자기가 서 있고,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과 일이 곧 도량석道場席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우리는 각자의 보고서를 준비해야 한다. 때가 되면, 우리 자신이나 혹, 저 위의 누군가가 틀림없이 보자고 손을 내밀 것인즉…..
P279
이 비유는 또 한편 ‘영혼을 저당 잡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있다. 즉 1)자기 수준만큼 세상을 본다.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시각, 남을 평가하는 언사는 곧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흡사 거울과 같다. 무학대사의 만고 격언처럼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
역시나, 야부는 지금 2)인간의 눈이 밖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우리는 늘 밖을 향해 헉헉대고, 그리하여 내면적으로는 불안하고 빈곤하다. 그 실존적 사태 하나를 짚어주고,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P292
“바다 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고, 날마다 봉우리 오르면서 산이 어디냐고 두리번 거리느냐?” 자기 속의 부처를 확인하는 것이 돈오頓悟라면, 자기 속의 부처를 ‘보호’하고, ‘성숙’시키는 것이 점수漸修이다.
P351
“나는 주인공이다. 바깥에 끌려 다닐 한심한 인생이 아닌 것이다.”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자기망각 상태에서의 분출하는 반응이 줄어들면, 그의 의식은 점차 고요를 찾기 시작한다.
P355
여래는 우리가 상상도 않던 곳에, 전혀 기대치 않던 곳에 있다. 하찮은 들풀, 내가 내다 버린 쓰레기, 그 속에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식을 본격 전하고 있는 경전이 [화엄경]이다. 그 경전의 본래 이름이 [잡화경雜花經] 즉 허접한 꽃들의 축제였다. 선재동자는 세상이 하찮다고 생각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그 선지식 안에 창녀와 승려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길을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손가락 튕기듯 법을 깨닫는다. 이 모든 사건이 상징하는 바는 분명하다.
P374
그렇다면 너는 곧 부처이다
지눌은 자성이 대체 무엇이고 그게 어디 있느냐는 학인들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 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그럼, “이 자성을 어떠헤 해야 깨달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지눌은 다시 친절을 베푼다.
네 마음이 이미 그렇다니까, 못 알아듣고선 무슨 수를 써야 하느냐고 묻느냐, 무슨 수를 쓰자고 들면 지식이 개입되고, 그럼 일은 어그러져 버린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제 눈을 찾아 헤매는 것과 같으니, 사물이 보이는 것으로, ‘내 눈이 있구나’하면 되지, 다시 그걸 찾아다닐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찾을 생각도 말고, 안 보이네 어쩌네 하는 생각도 하지 말게. 내 마음의 신령스런 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라, 이미 활동하고 있는데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찾으려고 들면 못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견성 見性한 것이야.
P394
책의 첫머리에서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차이를 짚어준 바 있다. [반야심경]이 고도의 압축성으로 의미의 블록을 조직화해놓은 데 비해, [금강경]은 변주와 반복으로 이어지는, 음악이나 이야기를 닮았다고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점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P402
금강경은 어디 있는가
지금 찌를 질러놓자면, [금강경]이 계속 “~~는 ~~가 아니다. 그래서 ~~라고 한다”라는 어법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도 그리고 그 유명한 ‘뗏목의비유’도 [금강경]의 책자의 권위만 믿고, 정장 중요한 메시지의 습득을 소홀히 할까 싶어 우려한 경계의 말씀이다. 그 노파심의 극단에서 ,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이 발흥했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시는 사태이다. 만해 또한 그 전통에 따라 “[금강경]은 먹으로 씌어진 책 위의 문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선의 중흥자이자 실질적인 창시자인 육조 혜능은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취지를 장악하는 방법을 권유했다. 예컨대, 소승과 대승에 대한 그의 정위는 이렇다.
소승小乘은 아직 문자의 숲에서 헤매는 사람이고, 중승中乘은 문자의 취지를 대강 캐치한 사람, 그리고 대승大乘은 바로 그 자각에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럼 최상승最上乘은? 그는 바로 그런 노력조차 필요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혜능의 분류대로 하자면, 소승에서 대승, 그리고 최상승으로 올라서는 바로 그곳이 ‘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다시 혜능의 비유를 빌리자면, “[금강경]에 휘둘리지 않고, [금강경]을 굴리는” 자리가 바로 ‘이 경전이 있는 곳’이라 하겠다.
P405
몸으로 읽는 [금강경]
[금강경]의 수지독송은 다시 말하지만, 경전의 취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몸에 새겨 기억시켜나가는 자심自心의 작업이다. 그 체득을 위한 고투의 현장이 바로 ‘이 경전이 있는 곳’이다. 그 땀과 피를 향해 인천人天 아수라들이 머리를 숙여 경배하고 꽃을 흩뿌려 공양할 것이다.
P435
[금강경]이 적고 있듯, 세상은 너와 내가 평지풍파平地風波로 일으킨 먼지로 뿌우옇다. 흡사 여름날 빗자루를 꽁지에 단 말이 한바탕 히힝거리며 춤을 춘 것 같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이 마음의 풍경이 그저 속상하고 안타까워던 사람들이다. 무의식에서라도 신호가 왔기에 독자들은 절을 찾고, 명상을 하며, 또 이 허접한 글을 쫓고 있을 것이다. 그 발심發心만으로 이미 절반은 이루어졌다. 그 신호를 따라 가다보면 적절한 계기와 절차를 거쳐 그리던 평화와 아타락시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란다.
“어리석은 마음에 출몰하는 생멸 生滅을 ‘지혜’로, 반성과 자각으로 제거하십시오! 혜능의 권고가 이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다.
이 수행자들의 아상 我相이 더욱 위험하다고 혜능은 앞의 3장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일체의 법에 대해 무심한,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고, 거기 기반하지 않는 삶을 이루라, 그것도 입으로만 말고, 실천으로…….”
P442
그러므로 늘 스스로 돌이켜야 한다. 세상은 평온한데, 내가 스스로 상相을 짓고, 스스로 찧고 까불며 깨춤을 추지 않는지를…..인간은 다들 이 오래된 습관이 만든 자기 감옥 속에 갇혀 산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감옥의 크기와 성격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한다. 결코 세상은 자기 눈높이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불교는 각자의 식識에 따른 세상의 층위를 33천天으로 설정해 놓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자기 ‘세계世界’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기 같은 줄만 안다. 그러나 각자 욕망과 습관의 지도는 서로 매우 다르고 또 훌쩍 격이 다른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욕심에 따라 물불 아니 가린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은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불교가 이를 알고 있기에 불보살 佛寶薩을 경배하고, 또 어느 절에서는 상대를 마주보며 조건 없이 절을 올리며 펑펑 눈물을 쏟는다. 민주화된 세상에 누구나 다들 같은 줄 알지만,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주체와 간섭 아니 받는 자유를 고귀한 가치로 알지만, 천만, 이것은 시대정신의 착각일 수 있다. 만해는 읊는다. “다들 자유를 좋아하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감격하지 않으면, 귀의할 곳이 없을 때, 그 삶은 허망하다. ‘허울 좋은 자유’의 오만에서 허무주의가 자란다. ‘인격’과 ‘영웅’을 알아보고 거기 절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혜능의 권고대로 살아보자. “염념念念이 반야바라밀을 올바로 수행하고, 무착無着 무상 無相의 행 行을 닦아나가자. 그때 먼지처럼 뿌옇던 망념들이 청정한 법성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구원되지 않는다. 입만 열면 남의 탓을 하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마라. 그들을 책임 있는 자리에 앉혀서도 안 된다. 불평을 말하기보다 불리한 여건에서 무슨 작은 일이라도 성취하여 세상에 보탬이 될까 생각하라. 그 ‘작은’ 태도 하나가 보통사람과 영웅을 가린다. 말 많은 세상, 남의 탓 하고, 세상을 적대시하느라 원망과 어지러움이 가득한 세상, 희망의 불씨를 위태롭게 만드는 혼돈과 광품의 세상에 이 덕목이 목메게 그립다.
불 꺼진 화로, 먼지 덮인 사당
말은 즉 그러하나, 실지實地 여기까지 가기는 정말 어렵다. 밖을 향해 허덕대기를 멈추어야 하고, 밖으로부터 받는 자극에 초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평판이 곧 자원인 사회에서 자극에 초연하기는 정말 어렵다.
이를테면 학벌, 재산, 지위 등의 불균형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깊고 오랜 자국을 남긴다. 불교는 그것 의식하지 말고, 상相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구호만으로는 실효가 있기 어렵다. 절에 위안을 의탁하신 분들도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해결된 듯하고, 상이 다 녹은 듯한데, 절무늘 나서서 일상으로 돌아서는 순간, 다시금 그 이전투구와 먼지 가득한 세상으로 던져지는 반복의 경험들….
여기 외람되지만, 하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이 있다. 욕망도 먼지도 제거하려고 들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지눌 스님도 [수심결]에서 “풀을 돌로 누르듯이 망념을 제거하려 들지 마라. 그 만큼 위험한 시도가 다시 없다”고 경계하셨다. 그럼 어떡할 것인가. 내 생각에 세 가지 길이 있다.
1) 욕망이나 먼지나 앞뒤 차단하고, 그 관성을 성찰하는 혜능식 ‘좌선’을 통해 먼지는 가라앉는다. 지관타좌只管打左, “다만 앉으라.”
2) 두번째 길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경쟁적이지 않은 길을…….사람을 피곤하지 않게, 세속적 가치와 다른 이를 테면 예술적 가치나, 보람을 주는 일을 찾아 거기 매진하는 것…..남들이 하찮게 여겨도 좋다. 자기만의 가치, 자기만의 삶을 몰두할 때, ‘그 자체’로 즐겁고 보람 있을 때, 거기가 곧 열반이고, 자유다. 이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보시나 헌신, 봉사를 통해 얻는 기쁨도 들어 있다.
3) 세번째가 종교적 전향이다.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주는 행복은 세속의 물질이 한시적이고 타자적인 데 비해, 그리고 그 ‘물질’들이 쉬 효용이 떨어지거나 자기파괴적이기 쉬운 데 비해, (쇼핑 중독 같은 것, 마약이나 과도한 성性적 방종, 권력에 대한 맹목적 집착 같은 것이 그렇다.) 이 영혼의 기쁨은 내면의 안정에서 외면과 타자로 펼쳐가는 잔잔한 명상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어주고 전체의 휴식을 제공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다. 그 힘이 동심원으로 물결치고, 교제하면 어느덧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힘은 바이러스처럼 빠르고, 한꺼번에 세상 전체를 물들이고 바꾸어 놓는다. 사람들이 이 가치를 잘 믿지 않는다.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 가령 정현종의 시들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P450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면서 제 눈에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중용]은 “말은 내 행동을 돌아보고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자신이라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를 돌아본 다음, 입을 떼는 조심스러움이 인품과 능력의 가치를 가르는 큰 갈림길이다.
무아란 실천적으로 보자면, 비판으로 자동 모드 변환하는 자신의 오랜에고의 관성을 홀딩하는 일이기도 하다. 싸그리 불평을 쏟아놓기보다 보완의 방책을 어드바이스하고, 더 나은 대안을 설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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