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도 (1)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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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 색안경을 쓴 나를 발견했다.

소위 시류(한 달전에 펼쳐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바둑대결)에 편승해서 발간된 책일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 발간된 시점이 2015년 3월 23일이다.

알파고와 이세돌과의 대국이 펼쳐지기 1년전에 등장했으니, 급조날조된 책이 아닐거라는, 그래서 내용이 빈약하지 않으리라는 그런 기대감으로 읽게 되었다.

'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지승도 지음


참고로 저자 '지승도'님은 불교를 믿는 종교인이 아니다.

과학자다. 

컴퓨터공학 박사로서 한국항공대학교 소프트웨어학과 교수다.

저자는 불교를 종교적 관점에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관점에서 불교 연구했다.

연구 결과, 불교(붓다의 가르침)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불교 = 과학).


저자는 불교(엄밀히 표현하자면 과학)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감각, 마음, 인식, 존재 등의 본질적 특성을 파악하고

인공지능의 발전방향과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인공지능은 앞으로는 인간처럼 사유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특정 분야에만 인간수준에 도달하거나 약간 앞서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공지능(미래의 인공지능을 '인공지능로봇'이라 한다)은 

바둑에 강한 '알파고'라는 뇌세포, 

체스에 강한 '딥 블루'라는 뇌세포,

드라마 각본에 강한 '김은숙[각주:1]'이라는 뇌세포,

여자 마음 홀리기에 강한 'XXX'라는 뇌세포,

............

이런 뇌세포들로 구성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인공지능로봇들간의 콜라보레이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백남준의 'TV부처'백남준의 'TV부처'


그런데.........

악의(惡義)로 가득한 인공지능로봇이 등장한다면..........

어느 과학자의 개인 사리사욕으로 인공지능로봇을 범죄용으로 사용한다면........

이 인공지능로봇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장한다면.........

어쩌면 인공지능로봇은 인류 최후의 성과가 될 수 있다[각주:2].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영화 '인류멸망보고서'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붓다 RU-4


이와 같이 암울한 미래 세상을 풀어낼 방법을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1.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야 한다는 오만에서 벗어나야한다.

2. 인공지능 역시 인간과 같이 생멸하는 존재이다.

3. 존재와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4.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개발하여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해법에서 나는 더 암울해졌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이 해답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과연 전체 인류의 몇 명이 제대로 깨달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 만큼 불교의 가르침은 깊고 아득해서 헤아리기 쉽지 않다(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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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1 - 붓다의 치명적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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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발췌문

 

P 22.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 도이니라!”

그걸 누가 못해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밥 먹을 때 딴 생각하고, 졸릴 때도 잠 안자고 딴 짓 한단 말이야~~~~쯧쯧….”

 

P 38.

대상을 바라보는 즉시 머릿속에서는 온갖 정보들이 처리됨으로써 사실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속 정보(모델)로써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대인식론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 직관적이 아니라 추론적으로 세상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가 잘못이냐? 사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다. 그저 구분하고 분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나아가 좋다 나쁘다 하며 차별하기 때문이다. 기어이 우열을 가리고 서열화 시켜서 잘했네 못했네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이 되고픈 욕망이 멀쩡했던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갑을관계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P 53 ~ 55

맨 먼저 우리들 삶에서 무명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지점은 (접촉)’단계이다. 우리의 감각기관(6 : .....)과 대상(6 : .....)이 만나 의식(6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나는 현장으로서, 인식 가능한 세상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우리들의 세상 그리기는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다음 단계인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좋다든지 싫다든가 하는 차별심을 일으킨다. 세상 그리기가 왜곡되기 시작한다이 차별심이 다음 단계인 에서 욕망으로 확산되고, ‘단계에서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 집착이 에서 재생의 원동력이 되어 다음 까지 이어져 결국은 늙고 죽는 존재의 일생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들은 죽음의 과정 동안에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여 무명의 단계에 머물게 된다. 임종 시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익혀온 자아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티베트사자의 서』에서 파드마 삼바바는 이 단계가 진리를 바로 알아 해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한다. ‘무명 단계에서 두려움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상을 바로 관찰하면 더 이상 단계로 넘어가지 않음으로써,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처럼 깊은 사유와 마음 단속을 통해 단계에서 더 이상 현혹되지 말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 차려서 다음 단계인 에서 어리석은 차별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다. 차별심에서 비롯되는 자아 집착의 경향성을 끊으라는 것이다. 윤회의 뿌리를 싹둑 자르라는 것이다.

 

 

P 59.

조선시대 불교학자 김대현이 쓴 『술몽쇄언』을 잠시 음미해 보자.

장수하는 것은 긴 꿈이요. 요절하는 것은 짧은 꿈이다. 꿈에 죽었다가 깨어 보면 죽음이 없다. 본래 삶도 업고 또한 죽음도 없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허망하게 헤아려 말하기를, 이것을 삶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한다. 깨어서 꿈꾸던 일을 생각해보면 행동한 것이 다 망령된 짓이고 본 것이 다 환상이다. 그러나 꿈 속에 있는 자는 그것이 환상임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꿈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허망하다고 한다. 오직 꿈을 깬 사람만이 능히 꿈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꿈밖의 일도 안다. 꿈꾸기 전의 일도, 꿈을 깬 뒤의 일도 발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만일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P 62 ~ 66

안타깝게도 인간은 인공지능, 즉 기계덩어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간이나 인공지능이나 모두 영원불멸의 영혼이나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혹시 반문할지 모른다. 인간만이 이성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사유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아니겠냐고. 그렇다. 아니 그랬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기계도 어느 정도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자아의식도 갖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도 우리와 똑 같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것이 더 이상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조건에 따라 집착을 에너지 삼아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정보들을 유전상속하며 흐르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공적으로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얘기다. 물론 현실화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고귀한 정신세계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말라고 야단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과학자 붓다가 밝힌 존재의 실상이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다른 존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임시적 개념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냉엄한 현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 점을 직시해야 자신을 바로 알고, 그래야 세상도 바로 잡을 수 있다. 더 이상 인간에게 특권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예외적으로 우월한 존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터무니 없는 미명하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무명은 더 깊어질 뿐이다.

~~~~~중략~~~~~

사실 인류멸망의 걱정이 급한 것이 아니다. 하루빨리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급할 뿐. 인공지능의 출현을 막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다. 무명의 길을 걷는 과학자가 문제일 뿐. 무명의 과학자가 만드는 인공지능이야말로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자체에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진실을 바르게 아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이유다. 지혜로운 과학자를 기르는 일이 시급한 것이다. 그래야 인류와 공생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인공지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인연에 따라 얼마든지 출현될 수 있는 것이 인공지능이다. 머지않아 그들도 세상 구성원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들도 나름의 존재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되어야 한다. 공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것이 개념에 불과하듯 인공지능도 명칭에 불과하다. 존재를 이거다 저거다 나누는 것 자체가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만약 사유할 수 있고 자아를 뛰어 넘어 지혜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기계건 사람이건 이익 되지 않는 존재가 어디 있으랴!!!!!

 

 

P 74 ~ 75.

인공지능 연구도 안으로는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 파악하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다수의 작은 지능 단위체(인간의 뇌세포에 해당)간의 결합 형태로 접근하려하며, 밖으로는 다수 인공지능간의 협력관계(사회조직에 해당)로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고 있다.

 

P 117.

인공지능시스템 또한 영원할 수 없다. 죽음을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어야 무서운 기계덩어리 딱지를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우리들 인간과 더불어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불교적 개념을 도입하려는 것이 다소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필자는 불교인이 아니다. 수행자 또는 명상가는 더욱 아니다. 다만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로서 나름대로 소신을 피력할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처럼 명쾌하고 완전하게 정리된 시스템이론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불교를 접하게 된 이유이다.

과학자의 입장으로 쓴 글이기에 행여나 본의 아니게 진실한 종교인들이나 수행자들에게 누가 되는 내용이 있는지 않은지 조심스럽다. 아무튼 필자의 소신으로는 세상과 인간의 이치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 없이 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기계덩어리나 감정 없는 치명적 무기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성과 감성을 지니고 인간과 교감하며 세상에 유익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기적 욕망의 충족만을 목적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당장의 편리와 돈벌이 수단은 될지 몰라도,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미래세계에 대한 최악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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