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아니 십여년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 함양 상림숲 입니다.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에게 상림숲이 어떤 의미로 다가온 계기는 이병주의 '지리산'이라는 소설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인 '하준규'가 빨지산(?) 활동하면서 보광당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이 곳 함양 상림숲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소설 속의 '하준규'라는 인물이 실제 인물 '하준수'였다는 것을 알게된 후로 항상 마음 깊은 곳 '함양 상림숲에 꼭 가봐야 겠다'라는 다짐을 묻어두고 있었답니다.
실제로 함양 상림숲에는 하준수 신도비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맥락을 알고 상림숲을 거니는 사람은 드물듯 합니다.
역사의 그물로 포획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문학으로 표현해 낸 이병주 역사 장편소설 『지리산』제1권 "잃어버린 계절"편. 혼란했던 우리 현대사를 살아 온 하준규라는 인물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중앙대학 법학부 졸업반인 주인공 하준규가 학도병 지원제 실시를 맞이해 겪었던 고민이나 학병을 거부하고 덕유산에 은신하기까지의 과정, 덕유산을 거쳐 괘관산(지리산)으로 가 보광당을 조직하여 해방을 맞이하는 과정
삼십년을 살아오면서, 책 속에 나온 인물과 핏줄을 나눈 후손을 처음 만났다.
주인공의 후손을 찾아 일부러 나선 것도 아니다.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진 만남 속에서....
흔히 빅 프로젝트(?) 때문에 이루어지는 만남의 특성 상 미팅의 초반에는 만남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워밍업을 시작한다. 예를 들면, 고향이 어딘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고향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는 그 사람이 그 분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황홀감을 느꼈다.
대학생 시절 조정래[태백산맥]과 더불어 재미있게 보았던 이병주[지리산]이다.
이 포스터에서는 사상 혹은 이념을 주제로 삼지 않고자 한다.
[태백산맥]은 지방사투리가 어울어지는 감칠맛이 났다면, [지리산]은 인물의 매력(해박한 지식,뛰어난 무술)에 뿍 빠져 읽었다.
하준수(남도부) 남도부(南道富, 1921년 ~ 1955년)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조선인민유격대 지휘관을 지냈다. 본명은 하준수(河準洙)이다.
생애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출생했다. 남도부의 집안은 함안의 부호로 당시 그의 아버지 하종택은 오랫동안 면장을 지냈으며, 천석꾼이었다. 진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진주중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주오 대학 법학부에 다니던 중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이에 남도부는 징집을 거부하고 병역기피자가 되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다. 1945년 3월, 지리산 근처 괘관산에서 동지 70여명을 모아 조직한 결사 단체인 보광당은 무장을 갖춘 체제를 이루어후에 공산주의 파르티잔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남도부는 당수와 구보에 능한 무술 고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건군준비위원회’를 설치하고 ‘새생활운동’을 펼치며 건국에 대비했으나, 1946년 1월,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다. 당시 이념적 지향은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여 함양군당 위원장을 맡았고, 인민당과 공산당이 합당하여 남로당을 만들었을 때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온건했다.
그러나, 당시 친일 전력이 있는 경찰에 쫓겨 지리산에 숨어들게 되자,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 까닭을 미군정의 정책 때문이라 생각하여 미군정 지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도부라는 가명은 이때 받은 작전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1949년에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었을 때 제3병단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사령관인 김달삼과 함께 태백산 일대의 유격대를 지휘했다.
한국 전쟁 중에도 태백산과 일월산 등을 무대로 유격전을 벌이다가 휴전 후인 1954년에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된 뒤 1955년 여름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되는 순간에도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 하준규가 남도부를 모델로 삼은 인물이라 이 소설이 널리 읽히면서 유명해졌다. "전설적인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라는 문구와 함께 《남도부》라는 제목의 실화소설도 나와 있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보다 더 불꽃같은 혁명가의 삶을 살다 간 하준수(1921~1955)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게바라(1928~1967)보다 더 일찍 태어나, 더 일찍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는 미 군정 시절 유격대의 작전명 남도부(南道富)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함양군의 천석꾼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진주중학교(현 진주고) 재학시절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해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졸업반 시절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숨어든 그는 지리산에서 동지 70여 명을 규합, 보광당이라는 항일 무장게릴라 부대를 창설합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파르티잔이었습니다.
체 게바라(왼쪽)와 하준수. 게바라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하준수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는 해방 후 몽양 여운형과 함께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군대 창설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 군정에 의해 좌절당하자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 미 군정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지휘합니다. 이 때의 작전명이 남도부였고, 그 때부터 그는 하준수라는 본명보다 남도부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했으나 1953년 휴전 후에도 남한에 남아 태백산과 일월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1954년 부하의 밀고로 대구에서 체포돼 1955년 김창룡 특무대장의 심문을 받고 총살당했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 네 살이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안락한 삶을 거부한 채 해방 이전엔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맞섰고, 해방 후엔 미 군정에 게릴라전으로 맞섰으며, 단독정부 수립 후엔 이승만 정권에 인민군 중장과 파르티잔 지휘관으로 맞서다 간 그의 짧은 삶은 어쩌면 체 게바라보다 훨씬 치열했습니다.
하준수의 생가를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우리나라가 이념 대립만 없는 사회라면 게바라보다 더 유명한 혁명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게바라를 아는 한국의 젊은 사람들 중에도 하준수를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의 고향은 경남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입니다. 지금도 그의 생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의 하준수 생가.
도천마을 역시 한국전쟁 때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곳입니다. 하지만, 좌-우 어느쪽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든 관계없이 그의 고향마을에서 하준수를 나쁘게 말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부잣집 아들 출신 좌익이긴 했지만, 해방 후에는 곳간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쌀을 나눠줬을뿐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해꼬지를 하지 않은 따뜻하고 높은 인품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른 키 두 배가 넘는 담을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축지법을 쓰는 전설적인 무술의 고수로 기억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사람들에게도 신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어머니 집 쪽에서 본 하준수 생가.
그의 생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폐가로 방치되고 있죠.
이미 지붕의 한쪽 귀퉁이는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몇 년 지나지 않아 저절로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하준수의 집은 한 채가 아니라 대여섯~일곱 여덟 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분이 살고 있는 인근의 집도 원래는 하준수 작은어머니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왼쪽 지붕은 허물어져가고 있다.
이들 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문화재적 가치도 높습니다. 하지만 전설적인 좌익 게릴라 총사령관의 집이어서인지 행정관청에서도 전혀 보존에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좌와 우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서 전설적 인물이었던 그의 집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면 아마도 비난하는 사람이 적지 않겠지요?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그의 집을 보면, 점점 묻혀져 가는 현대사의 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