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5)
1박2일 전남 여행 - 첫째날3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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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1박2일 전남 여행 스케쥴에서 여수엑스포가 여행코스에서 제외되면, 낙안읍성처럼 일부코스는 앞당기고, 또한 새로이 추가시킨 코스가 있으니 바로 '송광사' 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상식 수준의 지식은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삼대(불법승) 사찰 중의 하나인데, 그 중 '승(僧)'의 사찰로서 승보사찰이라는 정도 입니다.


여행 다녀와서 조사해 보니, 서울 길상사를 말사로 두고 있는 사찰이더군요.

서울 길상사가 떠오르니 법정스님이 수행하셨던 '불일암'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군요.

이 불일암이 송광사의 부속 암자 중의 하나라는 것도 이제서야 알게 됩니다.

송광사가 애시당초 여행코스에 포함되었다면, 불일암을 둘러보고 왔을텐데라는 아쉬움이 가득합니다.


허나 송광사로 입구 숲길에서 싱그러운 공기와 대자연의 냄새에 흠뿍 취했기에 후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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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이용이 주는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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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게 되는데, 자동차 안에서는 라디오를 듣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곳 서울에서도 직장 동료의 자동차를 이용하여 출퇴근 합니다. 그러나 간혹(당직, 일직) 혼자서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지하철이 가끔씩은 뜻 밖의 선물을 가져다 주곤 한답니다.
잊고 지낸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환기 작용도 하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 운전하면서 듣는 라디오는 어딘가 모르게 나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반면에, 지하철은 스스로 생각하게 공간과 시간을 제공합니다.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역 승강장에 벽면에 붙혀진 좋은 시 또는 문구가  있어, 바쁜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으로 뒤 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조용한 공원이나, 사찰에서 만나는 사색의 시간 을 지하철에서도 즐길 수 있습니다.
길상사에서 찾은 법정스님의 말씀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찾은 글

4호선 이촌역에서 발견한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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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열반 후 다녀온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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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족과 함께하는 외출이외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홀로 서울 출장 중인 근래에도 숙소와 회사근무지 외에는 달리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미처 봄 옷을 가져오지 못해서 부득불 아울렛에 가서 옷 몇 가지 산 것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나 밤에는 숙소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삼각산 길상사삼각산 길상사

그러나 지난 일요일에는 혼자서 큰 발걸음을 했습니다. 며칠 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께서 회주로 계셨던 길상사에 다녀왔습니다.

일요일에만 즐길 수 있는 달콤한 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평소처럼 일어나서, 샤워한 후 지하철을 이용해서 한성대입구까지 갔습니다.

마침 길상사가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있어 올라 탔습니다. 길상사 초입에는 어리 어리한 부를 자랑하는 대궐같은 집들이 즐비 했습니다. 무소유 vs 극한소유의 각이 공존하는 장소였습니다. 셔틀버스를 탄지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길상사에 도착했습니다.


입구에서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가 쓰여진 걸개그림이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 입적 직후라서 그런지 길상사 전반을 휘둘러싼 분위기는 '침묵'이었습니다.
곳곳에 묵언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였습니다.

지금 이 시점 길상사가 원하는 것은, 아니 입적하신 법정스님께서 사부대중에게 던진  말씀이 바로
나 자신에게 귀기울여라 인가 봅니다. 나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것 입니다.
스님의 입적에 슬프하지 마라. 대신 자신의 깊은 소리에 귀 기울여라 인 것 입니다.

절 안은 생각보다 혼잡하지 않았습니다. 분향객들로 많이 붐빌 줄 알았는데 조용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았습니다. 먼저 분향실에 들러 삼배를 마치고 길상사 이곳 저곳을 둘러 봤습니다.

길상사의 유래!!
익히 많이 알고 있는 것 처럼 '길상사'는 어느 보살님께서 땅을 보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길상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은 원래는 고급요정 '대원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입니다.
'대원각'은 삼청각과 청운각과 함께 세 손가락에 꼽히는 고급요정 이었습니다. 당시 막강 실세를 행사하는 거물급 인사들이 즐겨 찾았다고 합니다.

이런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법명 : 길상화)보살이 법정스님께 시주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느 사찰과는 다른 건축물이 보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길상사 극락전 입니다.
확실히 일반 사찰과는 다른 특이한 건축양식인데, 이는 대원각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인가 봅니다. 2년전에 다녀온 어느 사찰도 양식이 좀 특이했는데 말입니다.

극락전극락전


땅을 기부한 사람은 누구?
일본 유학파이자 문학여성이었던 그녀가 왜 기생의 길로....
그렇다면, 어마한 땅값을 자랑하는 이 땅을 보시한 사람은 어떤 분일까요?
김영한은 기생이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한 그녀가 기생의 길로 들어 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영한의 일본 유학에 도움을 준 해관 신윤국(조선어학회 회원)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유학 중이던 김영한이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함흥에 투옥되었다눈 사실을 알고 귀국하게 되었으나 스승의 면회가 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김영한젊은 시절 김영한



법조계 유력인사를 알게 되면 스승과의 면회가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당시에 거물급을 만날 수 있는 직업.....바로 기생의 길에 접어 들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선뜻 이해하기 힘든 러브스토리....

청산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청산학원 3학년 시절의 백석

결국 스승을 만나지 못한 김영한은 시인 백석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이해가 힘든 동거까지 했다고 합니다. 

시인 백석의 집안에서 보면 아들이 기생과 교제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일인 것 입니다. 백석 부모는 이에 아들을 강제로 결혼을 올리게 했으나, 백석은 다시 김영한의 품으로 오게 됩니다.

이 즈음에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도피하자고 했으나, 김영한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앞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들의 마지막 이별이었습니다.


백석문학상의 백석 그 분!
한국 전쟁 발발 후 백석은 북한에서 교수로,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서 '대원각'을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시가 천억 원이 넘는 재산을 선뜻 보시한 김영한 보살에게 어느 기자가 후회하지 않냐는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라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길상화 공덕비길상화 공덕비

이 둘의 사랑이 얼마나 애뜻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돈 보다는 못한 것은 확실한가 봅니다.
혹시 길상사에 들리실 계획 있으신 분은 이런 내용을 알고 가시면 보고 느끼고 하는 감정이 더 깊을 거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길상사를 통해서 법정 스님보다는 길상화 보살에 대해 많이 생각 해 보았습니다.

김영한 & 백석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planetlover/130073934229

백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관련글 보기  

2012/05/09 - 1박2일 전남 여행 - 첫째날3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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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입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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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저를 출가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던 법정 스님께서 입적 하셨습니다.

일반인에게 불교 이미지를 친근하게 변화시켰고 무소유의 길을 알려 주신 분입니다.

어차피 서울에 출장 와 있으니 시간이 날때 길상사에 다녀와야 겠습니다.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 11일 입적한 법정(法頂)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1990년대 초반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직관적인 인식만이 아니라 금생에 내가 익히면서 받아들이는 일들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법정 스님은 한 핏줄끼리 총부리를 겨눈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서 고민한다. 그는 대학 재학중이던 1955년 마침내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날 집을 나선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서울에 내린 스님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의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스님(1888-1966,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종정)을 만나 대화한 후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삭발하고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부목(負木.땔감을 담당하는 나무꾼)부터 시작해 행자 생활을 했다. 당시 환속하기 전의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전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등이 함께 공부했다.

법정스님은 이듬해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정진했다.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0년 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통도사에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다 4.19와 5.16을 겪은 스님은 1960년대 말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의 불교 경전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 시절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과 유신 철폐운동에 참여했던 법정스님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후 반체제운동의 의미와 출가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고민하다 다시 걸망을 짊어진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법정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법정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기법문은 계속하면서 시대의 잘못은 날카롭게 꾸짖고, 세상살이의 번뇌를 호소하는 대중들을 위로했다.

산문인으로서 법정스님은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우리 출판계 역사에도 기록될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남겼다.

스님은 해인사에 살 당시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가리켜 "빨래판같이 생긴 것이요?"라고 묻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있는 한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스님의 이런 원력은 스님의 이름과 동의어처럼 불리는 산문집 '무소유'의 모습으로 꽃을 피운다. '무소유'는 1976년 4월 출간된 후 지금까지 34년간 약 180쇄를 찍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다.

법정스님은 다른 종교와도 벽을 허물었던 것으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마당의 관음보살상을 독실한 천주교신자 조각가인 최종태 전 서울대교수에게 맡겨 화제를 모았고, 1997년 12월 길상사 개원법회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법정스님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이듬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론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이밖에 조계종단과 사회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법정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 편집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지냈고 1994년부터는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시민운동단체인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어왔다.

출처 : 연합뉴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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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無量), 없다는 것인지, 무궁하다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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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 했습니다. 애초에는 등산을 할 작정이었는데, 마침 찾아간 산이 어린 아들 녀석이 오르기에는 좀 가파르다 싶어 등산을 포기 하고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어느 삼거리에 크게 세워진 절안내판[세계? 한국? 최대 OOO가 있는 무량사(無量寺) ]을 보고 방향을 그곳으로 돌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절에 있는 문(일주문?)은 들고나는 사람이 자유롭도록 하기 위해서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은 폭이 1.5미터 정도 였다. 폐쇄적이다라는 이미지가 확 밀려왔다.


문을 통과하면 여는 절과는 다른 광경이 물씬 풍겨난다. 익숙한 것 같기도 하면서 어색한 부분이 공존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청작업의 거의 되어 있지 않는 건물일까.. 그런데 단청이 새겨지지 않은 다른 절의 느낌이라기에 뒷끝이 석연치 않다. 익숙한 것 같으나 어색한 것..

기둥을 자세히 보면 소나무를 이용한 것 같은 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본 황노란색이 아니라 검은 빛이 감돈다. 아 그렇다. 익숙하게 보았다는 느낌은 바로 TV에서 가끔씩 본 일본 신사 분위기와 비슷하기 때문이였다. 아래의 사진 중 정중앙의 상부에 있는 사진을 보면 한국의 절에서 보기 힘든 배치형태이다. 마치 일본 신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좁은 일주문의 어색함을 잠시 접어 둔다면 잔디에 누워서 하늘 볼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 있다. 우리 아들은 손가락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의 무엇을 보는가?



구분을 짓지 말자. 하늘의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자체를 바라 볼 뿐이다.
무량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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