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다 in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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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액서원(Royally Sponsored)인 영주 소수서원을 다녀왔습니다.
슬럼프와 함께 찾아온 낯선 분야에 대한 자신감 결여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던 차, 기대하지 않은 해결방법을 하나 더 찾았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싶습니다.

picture from here

아마도 '일신제'라는 현판 이름도 중국 은나랑 탕 임금의 반명(盤 : 세숫대야)에 적혀있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고사성어에서 따 온 듯 합니다.


참고자료들


서원은 한국인의 건축관(觀)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의 드높은 정신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선비 정신 역시 우리가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유산입니다. 지금껏 유교는 잘못 이해되어 왔거나 너무 깎여서 평가된 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 선비정신은 우리가 버려서는 안 될 귀중한 정신입니다. 이번에는 서원과 관련해서 이 서원에 깃든 선비들의 정신 세계를 보았으면 합니다.
 
서원의 성격을 성균관이나 향교와 비교해보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균관이 국립대학이고 향교가 국립지방학교라면 서원은 사립지방학교(대학)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서원은 국립교육기관과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서원이 생기게 된 배경도 국립학교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조선 중기의 위대한 실학자였던 유형원은 서원의 발생을 향교의 교육이 잘못된 데에서 찾았습니다. 즉 성균관이나 향교가 과거에만 집착하고 명예나 이익만을 다투게 되어 뜻있는 선비들이 그 대안을 찾으려고 만든 게 서원이라는 것이지요. 선비들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학문을 닦고 후진들을 교육하기 위해 서원을 만든 겁니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에 중앙정치에 진출한 사림의 선비들이 중앙의 정치꾼(훈구파)들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서원이 생겨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림파들은 성리학의 이상을 정치에 실현시키려 했지만 현실 정치에 막혀 무자비한 사화를 겪으면서 낙향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때 지방에 만든 것이 서원으로 그들은 여기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재기를 노리면서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원이 일종의 후방 기지 같은 역할을 한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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