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남!’ 사람에 따라 이 단어에 어울릴 만한 이를 제각각 떠올리겠지만 나는 하정우(35)만한 다른 짐승남을 떠올리기 힘들다. <용서받지 못한 자>나 <추격자>에서 <황해>나 <범죄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당하는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다. 진짜 남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진짜 남자, 진짜 수컷의 냄새. 그가 그동안 영화 속에서 맡았던 역할들은 화려해 보이거나 멋져 보이는 것과 거리가 먼데도, 이 시대 가장 멋진 남자 배우로 그를 서슴없이 꼽을 수 있는 건 ‘진짜 수컷의 냄새’ 때문인 것 같다. 궁금했다. 그 안에 있는 수컷의 정체가….
- (<범죄와의 전쟁>에서) 욕도 아주 ‘찰지게’ 하시던데…. 중국집에서 소주로 입 헹구는 장면 있잖아요. 그건 진짜 술꾼들만 할 수 있는 건데 누구 아이디어인가요.
“전에 기사식당인지 어디선지 본 적이 있어요. 그때 강렬한 인상을 받고 나중에 꼭 써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요란스럽지 않고 잔잔한 방식으로 상대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거잖아요. 정말 확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러브픽션>은 완전 다른 느낌의 영화던데요. 두 작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데 힘들지는 않았나요.
“낙차가 커서 오히려 더 흥미를 갖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둘 다 워낙 오래전부터 준비됐던 거라 가능했죠.”
- 한 배역에서 빠져나오려면 오래 걸린다고 하잖아요. 어떠세요.
“영화 캐릭터의 습관이 일상에 배다 보면 힘든 거죠. 저 같은 경우는 바로 바로 다음 작품을 연결해 진행해서 그런지 큰 후유증은 없어요. 굳이 꼽자면 <황해> 찍을 때였어요. 11개월간 촬영했는데, 구남이란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 캐릭터가 어느 시점부턴가 제 일상에 침범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말투도, 욕도, 밥먹고 화내는 방식도. 그 습관들을 버리느라 힘들었어요. 보통 메이크업 지우고 거울을 보면 현실로 돌아왔구나 싶은데 구남이는 수염을 기른 상태로 있어야 하니까 세수해도 안 지워지잖아요. 그 느낌. 지루했어요. 그래서 당시엔 양수리든, 대전이든 웬만한 거리의 촬영지는 다 집에서 출퇴근했어요. 낯선 여관에서 자는 게 너무 싫더라고요.”
하정우는 최근 개봉한 두 영화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조폭과 연애에 매달리는 ‘찌질한’ 남자 역할을 동시에 해냈다. 그의 변신능력이 기가 막힐 정도다. 조폭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예전에 조폭들 모임에 사회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양쪽 계파가 모였던 행사장. 씩 웃으면서 “웃기든지, 손가락 잘리든지 알아서 하쇼”라고 하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죽기밖에 더하겠나’ 싶은 마음에 무대에 올라 “문신 콘테스트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을 사람 몸에서 다 봤다. 잘 보이지 않는 겨드랑이 밑에 거북이를 그려넣었던 한 조폭의 설명. “거북이는 습한 데를 좋아한다.”
“남자답다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과 통하는 것 같아요”
▲ “결국 그건 인간다움, 여성다움과도 다 통하는 것 같다. 난 요즘 방전됐다는 느낌이다. 다 집어치우고 사랑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 김제동
- <러브픽션>은 연애에 따르는 순차적인 감정의 변화를 묘사했잖아요. 그런 건 감정이입이 잘되나요.
“낯섦은 없어요. 연애는 신이 주신 선물이자 저주 같아요. 사랑하는 순간 그 사랑을 갖기 위해 무모하게 도전하잖아요. 정작 갖는 순간은 그 맛이 떨어지고. 이 비극적인 감정이 어디 있어요. 감정이 식어가는 것에 대해 남자는 자꾸 명분을 찾게 되죠. 영화에선 포인트가 겨드랑이털이었던 것 같고요.”
- 남자는 그래요. 나는 순정적이고 문제없다. 그런데 그냥 헤어지면 내가 나쁜 놈 같다. 그래서 명분을 찾나 봐요.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면 이 영화하고 굉장히 비슷해요. 못 믿으시겠지만 저도 연애를 해봤는데 명분을 찾게 되는 감정상태까지 가기 전에 다 차였어요. 스태프들이 제 별명이라고 붙여준 게 전형적인 ‘고미오빠’래요. 고맙고 미안한 스타일.
“새로운 걸 배웠네요. 전 뭔가 시작 전에 끝내든지, 끝장을 보든지 그래요. 중간 단계는 없는 것 같아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먼저 고백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되겠다 싶으면 계속 가고, 안되면 멈추죠. 그런데 표현에 있어선 열려 있고 유연해야 해요. 뻘쭘해하면 안돼요.”
-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전 저쪽에서 아니다 하면 ‘찌질’해지기 싫고, 한편으론 저쪽의 확신이 없는데 내가 표현하는 건 이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면 편하게 해줘야 한다 싶고….
“그러면 안되는데…. 생각을 바꿔야 해요. 일단 결실을 맺고 편하게 해줘야지, 그 전에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 편하고 좋은 오빠로 오래 보고 싶대요. 너랑은 맺어지고 싶다는 거 아닌가요.
“아름다운 거절이죠. 저도 예전에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어쨌거나 맘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무기력하고 미숙해지기 마련이죠.”
- 선생님!(좌중 폭소) 그럼 전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만나야 할까요.
“팜므 파탈 같은 느낌? 비욘세 같은 여자랑 잘 맞을 것 같아요.”
- 왜죠?
“선배님 안에 있는 날것의 야성. 그걸 꺼내줘야 해요. 그것만 나오면 다 통할 것 같은데요.”
- 날것의 야성, 수컷냄새. 이런 건 정우씨를 지칭하는 단어 아닌가요. 전 정우씨 영화를 볼 때마다 궁금했어요. 도대체 저 안에 있는 수컷의 정체는 뭘까 하고요. 남자답다는 게 뭐죠.
“글쎄요. 설명하기 참 어려운데…. 남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사는 것과 통하는 것 같아요. 떳떳하고 바르고 진정한 것, 그래서 당당할 때 남자다움이 펼쳐지는 거라고 봐요. 남들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죠. 결국 그건 인간다움, 여성다움과도 다 통하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전 요즘 방전됐다는 느낌을 받아요. 다 집어치우고 사랑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이번에 영화 찍으면서 최민식 선배에게 무척 감사했어요. 그동안 현장에서 나에게 뭔가 이야기해주고 혼내기도 해주는 사람, 기대고도 싶은 그런 사람이 간절하게, 무의식적으로 필요했어요. 그러던 차에 든든했죠. 난 그저 따라하기만 해도 되겠구나 싶었고. 어른의, 선배란 존재의 고마움을 느꼈던 작업이었어요.”
- 심리적으로 기대고 싶던 시점에 최민식 선배가 정확하게 나타난 거네요. 똑같은 노래를 들어도 훅 다가오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는 것처럼요.
“그런가 봐요. 주현 선생님에게서도 그랬어요. <구미호가족> 할 때 저를 챙겨주시고 많이 가르쳐주셨거든요. 전 제 분량 없는 날도 세트장에 가서 선생님과 시간을 보냈어요. 근처 선술집이나 밥집에서 밤새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죠. 어떤 배우가 되어야 할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또 선생님이 제 나이에 어떻게 하셨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제겐 어마어마한 가르침이었죠.”
- 그렇게 해주는 분도 흔치 않죠. 어쨌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정우씨가 가진 그릇의 크기이자 복이죠.
“맞아요. 아버지도 배우니까 아버지 생각도 나고요. 저희 아버지도 촬영장에서 심심하고 외로우실 것 같거든요.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최민식 선배가 가끔 그 말을 쓰는데 그게 가슴에 팍 와요.”
- 연기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서른 셋에 결혼해서 가족들 건사하면서 작품활동하신 거죠. 그게 보통일이 아니었겠다 싶어요. 점점 아버지를 알아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드라마 <서울의 달>을 하던 당시 민식이 형이 제 나이였고, 아버지가 민식이 형 나이였대요. 참 짠하고 묘해요. 연민 같은 것도 있고.”
- 존경과 동시에 따라오는 거죠. 엊그제 한강엘 갔다가 ‘강’이라는 시를 봤어요. 강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있는데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버지로부터 죽 내려오고 있는 정우씨 역시 자신만의 새로운 물길을 찾아가는 거잖아요. 배우로서, 한 인간으로서 정우씨가 트고 싶은 물길은 어떤 건가요.
“보편적이고 상투적인데…, 이순재 선생님 연세나 아버지 연세 때까지 거침없이 연기하는 배우였으면 해요. 롤 모델을 찾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의 불길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영화에 대한 지금 감정은 어떤가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인 만큼 영화를 통해 상처받는 경우도 많을 것 같은데.
“많죠.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많은 것을 할 수 없어요. 감독의 오브제로서. 거기까지인 거예요. 열정과 창조적인 것을 뿜어내고 싶어도 감독의 편집, 의도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내가 뭘 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오는 한계를 인정하고 작업해야 하는 답답함과 아쉬움이 있죠. 그리고 역할이 커지고 위치가 달라지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해요. 내 의도는 그게 아닌데 그게 오해를 받거나 무시당할 때가 있잖아요. 그때마다 괜한 짓 했다 싶고 내 밥그릇만 챙기자 싶은 마음을 먹게 돼요. 그런 게 힘들고 맥이 풀리는 일이죠. 게다가 뭘 몰랐을 때는 마음 편하게 연기만 하면 되는데 이제는 알고 싶지 않은 것,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다 보면서 해야 하는 게 힘들죠. 결국 사람과 지내는 관계에서 힘든 부분이 나오는 거죠.”
▲ “서른 셋에 결혼해 작품활동 하시며 가족 챙기시던 아버지를 이제 알아가고 있어요”
▲ “존경과 동시에 따라오는 것 같다. 아버지로부터 죽 내려오고 있는 정우씨 역시 자신만의 새로운 물길을 찾아가는 거잖아요.” - 김제동
하긴 연애든 삶이든 인생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몰라도 되는 걸 알았을 때 느껴지는 불편함과 무기력감. 모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에 발 딛고 살아가는 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 좋은 영화다 싶은데 관객이 외면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건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반대로 만듦새가 이상하고 아닌 것 같은 영화가 있는데 이상하게 잘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역시 이유가 있죠. 스토리나 기술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인생철학 등이 다 연결돼 있는 거거든요. 그런 거 보면 영화는 사람과도 같은 거예요.”
- 그런데 한 명이라도 영화를 보고 마음에 변화가 있고 감동했다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고요.”
- 한 감독님과 여러 작품을 많이 했어요. 윤종빈 감독도 그렇고, 나홍진 감독도 있고.
“그분들과는 좋은 영화가 어떤 건지, 좋은 연기가 어떤 건지에 대한 생각이 일치해요. 그러다 보니 연달아 작품을 함께하고 있는 거고요.”
하정우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식물이 되는 느낌이란다. 자신을 달구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존재, 모든 것이 휩쓸리듯 속도감 있게 들고 나는 현실에서 자신의 빈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그림이란다. 처음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남들이 볼까 창피해하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그 자체의 가치와 매력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단점에 연연하지 않고 장점을 통해 자신감을 찾는 에너지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큰 용기이고 치유라고 하잖아요.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런데 막상 하려면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단련하고 소화하면서 살아가는 거겠죠.”
- 살다 보면 내 모든 것을 받아주고 알아주는 내밀한 지지가 필요할 것 같아요. 정우씨에겐 그게 뭔가요.
“늘 변하지 않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요. 종교도 그렇고. 기도할 때가 참 좋아요.”
- 전 한 여자의 내밀한 지지를 받고 싶어요. 흑, 저 어쩔 수 없나 봐요.
“아녜요. 그것도 중요하죠. 남자가 돈 버는 목적이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결실을 맺는 것 아닌가요? 결국 남자가 돈 벌어서 어디다 쓰겠어요.”
- 그런 거죠? 그런데 정우씨가 여성에게 다가서는 방법은 뭔가요.
“유머감각? 제가 말발이 좋아요. 선수기질이 있대요.”
- 말을 참 ‘찰지게’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자기 주도권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거죠. 사람을 다가오게 만드는 능력이랄까?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그러니까 능력이 배가되는 거죠.
“흐흣, 감사합니다.”
- 에잇. 짜증나서 그래요. 도대체 뭘 안 갖췄나 싶어서요.
“학교 다닐 때 과회장이었어요. 연극영화과에 다녔는데, 다들 연기에선 날고 기는 사람들이 모인 거잖아요. 그 앞에서 장난치고 밑도끝도 없는 말을 던지는데 다 빵빵 터져요. 내가 개그 쪽에서는 뒤지지 않는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긴 거죠. 한번 탄력받으면 회의를 다섯 시간씩 한 적도 있어요.”
- 원래 유머는 80%가 뻥이에요.
“<범죄와의 전쟁> 찍을 때도 장난하고 싶은 욕망이 제어할 수 없게 올라왔어요. 해서는 안될 장난들도 쳤고.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어마어마해요.”
하정우는 입이 떡 벌어지고 상상을 초월할 만한 장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금연 표시가 돼 있는 카페의 내부를 쓱 훑어보다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건네온다.
“선배님. 우리 실수로 한대 피워 볼까요?”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이 매혹적인 권유를. 그가 불을 붙여주는 담배를 빨아 물며 물었다.
- 낮술 좋아해요?
“정말 낭만적이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죠.”
- 주량은요?
“소주 3병 정도? 서래마을 사시죠? 제가 낮술하러 한번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