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2)
난세에 답하다
반응형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한 사퇴 요구압력이 거셀 때에도 2MB는 한사코 거부했었다. 강만수에 대한 사랑의 끈을 질기게도 잡고 있었다. 비록 어제(2009/01/18)부로 다른이로 교체되었지만.

강만수에 대한 2MB의 믿음에 대한 근거를 사마천의 <<사기>>에서 찾았다.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
위문후와 장군 악양 사이에 있었던 일화도 의미심장하다.

악양은 중산국을 2년 동안이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다른 신하들이 끊임없이 악양을 중상모략했다.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과 관계가 좋기 때문에 악약이 일부러 공격하지 않는다는 등 문휘가 들어도 솔깃한 만한 중상들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문후는 악양을 끝까지 신뢰했다. 결국 악양은 중산국을 정벌했다. 귀국한 악양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문후는 악약에게 그동안 올라온 상소문이 가득 든 상자를 보여주었다. 감격한 악양은 모든 공을 문휘에게 돌렸다.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말 것이며,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라는 용인의 원칙을 절로 상기시키는 일화다.

이 짧은 글이 2MB의 인재기용패턴을 설명하는 것은 아닐까? 이 가르침만 믿는다면 2MB의 주장에 맞설 수 있는 논리가 없어진다.

하지만 제가백가의 4대학파 중 하나인 묵가의 가르침을 떠올려 본다면,
묵자의 인재관은 상동과 상현이다. 상동(常同)이라함은 인재 기용에 신분과 재산 따위를 따지지 말고 공평하게 사람을 기용함이요, 상현(常賢)이라함은 평등하게 인재를 기용하되 능력있는 사람을 기용하라는 가르침이다.

2MB의 용인술에 대항할 수 있는 합리적 반박을 <<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사기>>를 읽을 때 중요 포인트 : 단편적 취사선택 불가

이렇듯 <<사기>>에 나오는 수 많은 가르침을 단편적으로 취사선택해서는 정도(正道)로 나아갈 수 없다. 아마도 2MB는 '사람을 썼으면 의심하지 마라"라는 하나의 가르침에 기대어 스스로가 정확한 길(正道)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리라.




사마천의 <<사기>>는 3000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인간세상의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어떠한 가르침과 아쉬움을 드러내 놓고 있다. 
그 가르침과 아쉬움이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성찰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다.


<<사기>>가 나에게 전해 준 성찰의 과제들

1. 소통의 힘
소통 단절의 원인에는 청자(聽子)로서의 타고난 자질 부족, 자의든 타의든 소통 통로의 인위적 차단 등의 여러 이유가 있다. 소통이 없으면 길게는 성공이 없으며, 짧게는 사람이 떠나 간다.

2. 절박함
<<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요 이야기 거리는 원한과 복수의 스토리라 한다. '원한과 복수'가 가지는 어감이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오늘날의 분위기로 재해석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지속성을 담보하는데 아주 효과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단 반드시 절박함이 내제되어야 할 것이다. 
"원한과 복수 with 절박함"

3. 대계(大計)
일전에 올린 포스트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법에도 멀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은 적 있다.
<<사기>>의 주요 이야기 거리인 원한과 복수의 전개 시간은 짧게는 몇년에서 10년이상 인 것도 많다고 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10년 후를 내다보는 계획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내의 복수는 10년이라도 늦지 않다"



한때 자존심과 명예를 짓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름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사마천 알아보기

PS. 삼성경제연구소 선정 2009년 CEO 여름휴가 필독서에 선정되었음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라
반응형
운도 지지리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마라!

내가 수십년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주나라 태공망 강태공(姜太公)-







용모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 때 보잘 것 없는 외모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지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법증의 천거를 번번히 거부하며 십년간이나 말단벼슬아치 집극랑자리를 맴돌게 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까지 갖은 수모를 건뎌내야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전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 한나라 회음후 한신(韓信)-





한때 자존심과 명예를 짓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름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울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딸로 태어나
갓 14살때 최말단 후궁 재인이 되어
당태종 이세민을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 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비구니로 물러 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을 돌아와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가 된 후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
의를 처형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살..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고 나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 성신황제가 되어
15년간 천하를 다스렷다.

- 중국 유일 여황제 측천무후(측天武后)-





집안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말기 안휘성의 빈농 한족집안에서
탱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뭄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2인가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사대부 집안의 멸시와 견제속에서 시달려야 했다.

나는 송곳하나 꼿을 땅이 없었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 때 조차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천하를 회복한
명나라의 초대창업황제가 되었다.

-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장)-





나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때 황제가 되었고 13살 때 
결혼을 했으며
14살때부터 스스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의 삼번난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채 군주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돈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도 못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마루를 닦으며
잔심부름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 푼도 가진게 없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 주는 인재를 대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욱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 청대 말 거상 호설암(胡雪巖) -




만년 2인자라고 보스자리에 대한 욕심을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동안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공산당 초기의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통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인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옆에
꿇어 앉아야 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 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 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속에서도
미일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 속에 놓인 국각경제재견,
등소평을 재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따위는 돌보지 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 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 -





잘 나가다 넘어지고 재기했다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문화대혁명 때 반모주자파로 몰려 홍위병으로부터 공개비판을 당했고, 잠시 일어났지만 하방당하여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4년간 육체 노동자로서 버텨야 했다.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로 재기했다가4인방의 농간에 또 다시 실각하고 가택연금까지 당해야 했지만 모택동 사후 정국 수습용으로 재기용된 후 화국봉과의 5년 권력 투쟁끝에 최고 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3번 쓰리지고 4번 일어난 역전의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부도웅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등소평(鄧小平) -

[ 출처 ] 여백의 풍경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최근 작성 글
최근 작성 댓글
최근 작성 트랙백
프로필
공지사항
글 보관함
캘린더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ODAY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