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4)
노무현,마지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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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도서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기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운명을 달리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삼가 고인의 명복을 기원 합니다.

연 이은 서거에 대해 더 이상의 말을 이어가는 것 보다 아래의 짤막한 글로 원통함을 대신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하여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심리적 압박을 계속하는 등 자살은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이 결정적으로 충격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영화배우 안성기씨 인터뷰 내용 중에서....


이 글의 지은이 오연호씨는 1991년부터 오랜 시간동안 근거리에서 인간 노무현을 살펴온 사람이더군요. 이 책의 근간이 된 내용들은 8회에 걸쳐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오연호씨간의 실제 인터뷰 내용 입니다. 이 내용이 오마이 뉴스에 연재되었으며, 서거 이후 급하게 단행본으로 발간 된 것 입니다.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글의 내용들은 대부분 제목 그대로 인터뷰의 내용을 그래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글자를 읽을 때마다 노 전 대통령의 육성이 그대로 들리는 듯 해서 아주 좋았습니다. 

오연호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 대표 기자.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리젠트 대학에서 언론학 석사학위,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월간 말〉에서 심층취재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그는 2000년 2월 ‘모든 시민은 기자다’를 모토로 〈오마이뉴스〉를 창간, 시민 참여 저널리즘을 선도해왔다. 6만여 명의 시민기자가 참여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는 세계 언론계에 주목을 받았고, 그는 하버드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세계경제포럼, 세계신문협회의 초청을 받아 연설했다. 2006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이 주는 경영혁신상을 수상했고, 2007년 미국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이 뛰어난 언론인에게 주는 ‘미주리 메달’을 받았다. 

오연호 대표 기자(吳連鎬, 46세)는 1991년부터 노무현 대통령을 8번 단독 인터뷰했습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2002년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처음으로 밝힌 것은 2000년 3월 22일 부산 코모도 호텔에서 오연호와 했던 인터뷰에서였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2003년 2월 22일 첫 국내 언론 인터뷰를 신생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했을 때 오연호는 대표 기자로서 그를 인터뷰했습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2007년 가을의 3일간의 청와대 인터뷰는 그가 정치인 노무현과 가진 마지막 인터뷰였습니다.

머리말에서 오연호씨가 노무현이라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하게된 핵심 이유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 번의 개혁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는 한나라당의 정권 교체 흐름속에서, 우리가 노무현과 함께 만든 가치들이 무차별적으로 흙탕물 속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작은 삼태기 하나를 그 거센 물살들 어딘가에 대고 무언가를 추려 담고 싶었다. 

작가가 찾을려고 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3가지 분류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연호씨는 4가지로 분류했음 : 그의 자살,애증의 대상, 그의 정치학, 그의 사상)
1. 치열한 삶속에서 단련을 거듭해온, 인간 노무현, 그의 자살에 대한 분석
2. 애증의 대상, 인간 노무현
3. 인간 노무현의 정치학, 철학


우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터뷰 중 하신 말씀을 주욱 살펴보면,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주장에는 논리가 확실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고집스런 부분이 있기에 융통성이 부족하다 여겨질수 있지만 정도(正道)를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융통성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하여 변심을 일삼는 대부분의 정치인들과는 달랐습니다.
얕은 공부로는 체득하기 힘든 혜안을 지닌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혜안은 책상머리 공부로는 얻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정치인들 중에서 '열(十)박사','선생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공부많이 하신 분입니다.

본성 자체가 이타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혜안에서 비롯된 지혜를 이용하되, 그 결과물은 반드시 시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입니다. 권력의 궁극적 목적을 아주 잘 이해하신 부분을 읽을 때면 뚜렷하고 건전한 소명의식의 소유자라는 확신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노무현 이분이 바로 CEO형 대통령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품어 보았습니다.

비전과 전략......을 아시는 대통령입니다.
다음은 153쪽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분 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눈높이와 역사의 눈높이를 구분했다.
...중략...
"보통 민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 단위를 가지고 이야기해야하는 거지. 당장 그때그때 불편과 불만, 힘들어하고 푸념하는 것을 민심이라고 보고 거기에 정책의 수준을 맞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론에 기울여야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하지만, 그것 대신 역사의 눈높이라는 차원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핵심을 꿰 뚫어보는 차원이 다릅니다. 


협상을 아시는 대통령입니다.
다음은 176쪽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노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 이론을 거론했다.
...중략...
"보통 협상할 때, 내 카드를 보여주지 않는 것, 상대방이 내가 무엇을 할지를 모르게 하는 것이 하나의 협상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그것은 서로 이익을 가지고 나눌 때 하는 것이지요. 북핵 문제처럼 아주 중요하고 큰 문제, 말하자면 사태의 향방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는 아주 중대한 문제에서는 상대방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 포지션이 정확할 때 상대방이 산수로, 전략적 산수로 계산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예측하기가 좋은 것이거든요."
정도(正道)를 아는 분이십니다. 
(정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접근법이 다르다.... 
부산에서 서울을 갈려면 북쪽으로 가야하고, 평양에서 서울로 갈려면 남쪽을 가야한다......)


지금의 대통령은 자칭 CEO 대통령이라 합니다......
그러나 마이 짱(My JJang!)과는 급이 다른듯 합니다.
왜냐......이승의 그 분에게서는 이타(利他)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는 이타를 느낄 수 있음...강부자, 고소영)







쓸 거리...
오연호에 대한 반론
전직 비서관의 반대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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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행정안전부 정성을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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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늘 아침 9:00현재 기준의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 현황 입니다.
 지역 지자체 운영  민간 운영 
 서울 서울광장,
동대문구청광장,
성북구청 로비,
양천구청 대강당,
영등포구청사,
강남구청 별관 지하 1층,
강동구청 현관
강남역(7, 8번 출구),

연세대학교 김대중 도서관,

민주당 중앙당사
 경기도 경기도 본청1회의실, 2층 상황실, 용인시 처인·수지·기흥 구청사내, 안양시청현관,
광명시 시민회관,
광주시 구청사,
시흥시 상황실,
오산 시청앞 광장,
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
부평역 광장,

민주당 인천시당 사무실
 강원도 도청 대회의실  
 충청도 대전 시청 1층,
충북 도청회의실,
충남 도청강당
청주 상당공원,

민주당 충북도당 당사
 전라도 순천 팔마체육관,
도청 윤선도홀,
목포역, 여수시청 광장,
시의회 앞,
나주 시민회관,
담양 문화회관
광양시청 앞 야외음악당 및
과양읍사무소,
곡성 군민회관,
구례 종합사회복지관,
고흥군청 광장
보성역 광장,
화순 군민회관,
강진 문화원,
해남 문화예술회관 앞 광장,
영암군청광장, 함평군청 현관
무안 승달문화예술회관,
영광군청 영상회의실,
장성군청 회의실,
완도 농어민문화체육센터,
진도군청 앞 광장,
신안 하의면사무소
 김대중 컨벤션센터 1층,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민주당 광주시당
 경상도 부산시청 녹음광장,
부산역광장,
대구 2·28기념중앙공원,
경북도청 강당,
경남도청 강당,
울산 종하체육관
 민주당 울산시당
 제주도 제주도청 4층 대강당,
서귀포시청제1청사 2층 대회의실
 

위의 것은 DAUM에 올려진 자료 입니다.



아쉬운 것들......

1. 고인을 보내고 난 후에도 지역색을 버리지 못한 것 일까요.
개인적으로 경남에 사는 저로서는 경남도청에 가야만 하나봅니다.
아직은 가까운 장소에 분향소가 설치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전라도에 비해서 다른 지자체의 분향소가 터무니 없이 부족합니다. 고인을 보내고 난 후에도 지역색을 버리지 못한 것 일까요.


2. DAUM이 행정안전부에 압승한 거 맞죠?!
DAUM에서 제공하는 정보가 부족해서, DAUM상단에 나온 행정안전부에 가 봤습니다.

정말 실망이네요. 첨부파일로 올려 줘 있었습니다.
이걸 다운로드해서 볼 사람만 봐라는 그런 느낌 이었습니다.
실제로 제 컴퓨터에는 아래아 한글이 없거든요(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행안부

행정안전부 게시판에 올려진 분향소 정보...



어쨋든 아래아 한글 뷰어 프로그램을 설치한 부 행안부 파일을 열어 보니 오히려 DAUM자료 보다 빈약합니다.

분향소에 대한 정보는 국민들이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볼 사람은 다운로드 받아라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올려진 정보 역시 민간에서 진행하는 것보다 떨어 집니다.
제가 받은 행안부 자료를 보시기 바랍니다.

행정안전부 기준으로 분향소 정보 이용 방법
1.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이 없으신 분들은 여기로 가서 다운로드 받은 후,
2. 프로그램을 설치하세요.
4.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으로 파일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서 1~2번 과정은 필요 없이, 3~4번 과정만을 통해서 정보를 볼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 직접 내용 올렸을 때 정보 이용방법
1. 그냥 보면 됩니다.
참 쉽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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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김대중 서거 후, 국민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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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레시안 손문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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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님...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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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기자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22일 일반병실로 옮겼으나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金雲植)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87년, 92년 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97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 수감되고 해외 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80년에는 5월17일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해 7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서 민주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으나 민정당 노태우(盧泰愚) 후보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92년 14대 대선에서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 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95년 이를 번복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네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듬해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총재와의 야권 공조를 앞세워 9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건국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해 독재 종식과 민주주의 정착,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통령 재임 기간,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최고의 정보화사회를 구현했으며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임기 내내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 퇴임 후에도 대북 비밀송금과 국정원의 불법도청 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고 현실정치 개입으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60년대부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현실정치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온 이른바 `3김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 
jah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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